본문 바로가기
  • 세상속 어딘가에 묻혀 있을, 우주 어딘가에 잠자고 있을, 지구 어딘가에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숨겨진 보물들을 같이 찾아봐요!
지리학자의 본질/지리소설 메르카토르

제26화 — 황실의 폐허

by 덕지덕지 2026. 5. 23.

제26화 — 황실의 폐허

— 1 —

석운이 비명원 동쪽 출구까지 일행을 안내했다.

출구 너머로 산길이 더 깊어졌다. 자갈길이 가는 흙길로 바뀌었고, 양옆에 솟아 있던 키 큰 나무들이 점차 짧아지면서 들풀만 남았다. 사람의 발자국이 점점 잦아드는 자리였다. 한 시간 더 걸어 올라가면 황실의 폐허가 있다고 석운이 일러 주었다. 일행이 짧은 인사로 헤어졌다.

KA가 산 입구에서 일행을 받아 들였다. 외피 안쪽에서 현우가 호흡을 한 결 깊게 가다듬고 있었다. 본체가 무엇을 짚어내고 있다는 신호였다.

"현우 선생님, 무슨 일이세요?"

토르가 물었다.

"산 위에 한 사람의 가락이 짚인다. 50년 동안 짚이지 않다가 오늘 처음 짚인 가락이고. 옛 친구의 가락이야."

"옛 친구라뇨?"

"케이지 본체 갈래에서 같이 잠재워졌던 친구. 50년 전 한 분이 안 깨어났는데, 그 분의 가락이 산 위에서 살아 있는 사람의 가락으로 짚여."

메르의 마음이 깊어졌다. 현우 선생님이 살아 있는 사람의 가락으로 짚는 옛 친구. 50년 동안 안 깨어났던 본체가 어딘가에서 살아 있는 사람의 모양으로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 13화 펜타곤 본체 회랑에 늘어선 수천 구의 본체들 중 한 구가 그 분이었을 것이었다. 그 분이 산 위에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름이 짚이세요?"

메르가 짧게 물었다.

"동현. 옛 친구 이름이 동현이었어."

KA가 산길을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 2 —

산 정상 너머에 폐허가 펼쳐져 있었다.

옛 동방 황실의 자취. 사람 키 두 배쯤 솟아 있던 옛 궁궐의 기와지붕은 무너져 있었고, 큰 기둥들이 한 줄로 누워 있었다. 한 평생 사람들이 오갔을 마당이 잡초로 덮여 있었다. 풍경의 가운데에 큰 옛 단이 한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옛 황제가 의식을 올리던 자리였을 것이었다.

단의 가운데에 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

옅은 검은빛 옷을 두른 사람이었다. 50대로 보이는 모양. 머리를 길게 하나로 묶었고, 양손을 가슴 앞에 가지런히 모은 자세. 사람의 모양이었지만, 그 사람의 윤곽이 옅게 흩어져 있었다. 사람의 몸 안쪽으로 단 너머의 풍경이 한 결 비쳐 보였다. 비티움 안쪽에서 50년을 살아온 사람의 모양이었다.

일행이 단 옆에 멎었다. KA가 단의 자갈밭 옆에서 외피를 다듬었다. 현우의 호흡이 안쪽에서 한 결 더 깊어졌다.

사람이 일행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메르를 보았다. 메르의 얼굴 안쪽에서 어머니의 자취를 알아본 사람의 시선이었다.

"오셨네요."

사람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비티움의 사절들이 가졌던 차가운 결이 아니었다. 사람의 목소리. 옛 친구를 50년 만에 다시 만난 사람의 목소리.

"제 이름은 '동현'이에요. 검은 빛이 동쪽에 있다는 뜻이고요. 메르 어머님의 옛 친구입니다."

비티움 안쪽의 동현이 자기 이름을 건넸다.

메르의 호흡이 멎었다. KA의 외피 안쪽에서 현우의 가락이 짧게 응답했다. 본체가 옛 친구를 알아본 신호였다.

"어머니의 친구라고요?"

메르가 물었다.

"네. 솔, 단, 한라, 이라, 유선, 노철, 그리고 저. 어머님과 함께 50년 전 의식을 시작한 일곱 사람이었어요. 다른 여섯 분은 자기 자리에 머무르셨고요. 저만 다섯째 갈래로 같이 들어가서, 비티움 안쪽에 자기를 묻어 두었어요."

"왜요?"

토르가 짧게 물었다.

"비티움이 사람의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저희가 50년 전에 처음 짚어 봤어요. 비티움이 사람의 안쪽에서 시작된 자리라는 사실. 사람이 자기 안쪽 가장 깊은 곳에 모셔 둔 부서진 자락이 한 평생 자라나면, 그것이 한 사람을 비티움으로 만든다는 사실. 비티움이 처음부터 사람의 바깥에서 온 것이 아니라, 사람의 안쪽에서 자라난 자리라는 풀이지요."

동현이 가슴 앞에 모은 손을 천천히 풀었다.

"어머님께서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셨어요.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풀이였지요. 사람의 안쪽에 비티움이 자라난다면, 자기 자식의 안쪽에도 자라날 수 있다는 사실을 어머님이 가장 두려워하셨어요. 그래서 저만 다섯째 갈래로 들어갔어요. 어머님 대신, 비티움 안쪽에서 그 풀이를 50년 동안 살아 보려고요."

— 3 —

메르의 마음이 깊이 가라앉았다. 자기가 만난 비티움이 어머니의 적이 아니라, 어머니의 친구가 자기를 묻은 자리였다는 사실. 50년 전 일곱 친구가 시작한 의식이, 어머니의 결심과 동현의 결심으로 두 갈래로 갈라졌다는 사실.

"비티움이 사람의 안쪽에서 자라난다고요?"

메르가 차분히 다시 물었다.

"네. 한 사람이 자기 안쪽 가장 깊은 곳에서 자기를 외면하기 시작하면, 그 외면의 자락이 한 호흡씩 자라나요. 외면이 한 평생을 지나면 그 자락이 비티움의 한 가닥이 돼요. 그러므로 비티움은 사람의 적이 아니에요. 사람의 가장 깊은 외면이 모인 자리지요."

"그러면 비티움을 닫는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토르가 물었다.

"비티움을 죽이는 일이 아니에요. 비티움을 안아 들이는 일이지요. 사람이 자기 안쪽의 가장 깊은 외면을 외면하지 않고 안아 들일 때, 그 외면이 비티움에서 다시 사람의 자락으로 돌아가요. 다섯째 갈래의 마지막 자리에서 두 분이 하실 일이 그 안아 들임이에요."

"어머니가 왜 그 사실을 저에게 일러 주지 않고 가셨어요?"

메르가 마지막 한 가지를 물었다. 자기 어머니가 12년 동안 자기에게 한 마디 남기지 않으신 사실의 무게가, 이 자리에서 가장 짚이는 자리였다.

동현이 부드러운 미소로 응답했다.

"그 사실은 자식이 어머니의 부재를 12년 견딘 뒤에야 안아 들일 수 있는 사실이거든요. 어머님이 메르 양께 한 마디도 남기지 않으신 까닭은, 메르 양께서 자기 부재 안쪽에서 자기를 외면하지 않고 12년을 견디시는 일이 다섯째 갈래로 가는 첫 자락이었기 때문이지요. 어머님이 메르 양을 시험하신 게 아니에요. 메르 양께서 자기 자신을 사람으로 키워 내실 시간을 12년 두고 가신 거예요."

메르의 눈가가 젖었다. 12년 동안 자기를 외면하지 않고 견딘 자기의 자취가, 어머니가 자기에게 새겨 두신 첫 가락이었다는 사실. 21화 가짜 12살 메르 앞에서 자기 견딤을 알아본 자리. 그 견딤이 어머니의 부탁의 첫 자락이었다는 사실을, 메르가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받아 들였다.

동현이 단 위 작은 옅은 노란 돌 하나를 손바닥에 들었다.

"다섯째 갈래로 가는 열쇠예요. 어머님께서 100년 전에 여기에 두고 가셨고요. 이 돌이 다섯째 갈래의 입구를 짚어 드려요. 받아 가세요."

메르가 단 옆으로 다가가 손바닥을 폈다. 동현이 노란 돌을 메르의 손바닥에 옮겨 주었다. 손바닥의 닿음이 부드러웠다. 비티움 안쪽 사람의 손이지만, 어머니의 친구의 손이었다.

노란 돌이 따뜻했다. 어머니의 가락이 100년 동안 그 돌 안쪽에서 흐르고 있었다.

— 4 —

메르가 외투 안주머니에 노란 돌을 넣었다. 다섯째 갈래의 열쇠가 자기 안주머니로 옮겨졌다.

"동현 선생님, 함께 가시면 안 되세요?"

메르가 짧게 물었다.

"비티움 안쪽 사람은 비티움 바깥의 자리로 옮겨 갈 수 없어요. 50년 동안 자기를 비티움 안쪽에 묻은 결심이 그래서요. 다만 두 분이 다섯째 갈래에 닿으시면, 제가 그 안에서 두 분 옆에 한 번 더 짚여요. 그때 다시 뵐 수 있어요."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50년을 기다렸어요. 두 분의 한 호흡 더 기다리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동현의 윤곽이 한 결 더 옅어졌다. 자기를 비티움 안쪽으로 거두어 가는 결이었다. 가짜의 흩어짐과 달랐다. 자기 자리로 부드럽게 돌아가는 사람의 결.

"한 가지 더 알려 드릴게요."

동현의 윤곽이 거의 다 거두어지기 직전이었다.

"다섯째 갈래에는 어머님 한 분만 계신 게 아니에요. 토르 어머님께서도 함께 계세요."

토르의 호흡이 멎었다.

"어머니가 거기 계세요?"

"네. 두 어머님이 50년 전에 같이 들어가셨어요. 두 분 모두 거기서 50년을 견디고 계세요. 두 분의 자식 두 분이 같이 도착하시기를 기다리고 계시고요. 어머님 두 분이 한 자리에서 자기 자식을 같이 맞이하실 자리가 다섯째 갈래의 마지막이에요."

토르의 마음이 깊이 가라앉았다. 자기가 두 살에 보낸 어머니가, 다섯째 갈래에서 메르의 어머니와 함께 50년을 보내고 계셨다는 사실. 두 어머니가 친구로 같이 한 의식을 풀어내고, 두 자식이 친구로 자라나 그 의식의 끝에 닿는다는 사실. 모성이 자기 자식 한 명을 키우는 일이 아니라, 자기 친구의 자식까지 함께 키우는 일이라는 풀이가 이 자리에서 또렷이 짚였다.

동현의 윤곽이 거의 다 거두어졌다. 마지막에 두 사람 쪽으로 부드럽게 끄덕였다.

"또 뵙겠어요, 두 분. 다섯째 갈래에서요."

"또 뵐게요, 동현 선생님."

메르가 짧게 답했다. 동현의 모양이 단 위에서 완전히 거두어졌다.

메르가 외투에서 검은 막대를 꺼냈다. 토르가 가슴 위에 손바닥을 댔다. 서연이 자기 가슴팍에 손바닥을 댔다.

"같은 박자에."

세 사람의 도구가 단 한가운데에서 모였다. 막대의 일곱 가닥, 토르의 두 빛, 서연의 어머니 가락이 박자에 맞춰 단의 옛 자취에 닿았다. 황실 폐허의 가장 깊은 자리가 가지런해졌다. 옛 황제가 한 평생을 의식을 올리던 자리가 한 결 더 따뜻해졌다.

하늘 어딘가에서 별 하나가 호흡을 멎었다.

검은 점 여덟 개 가운데 네 번째로 떠올랐던 점이 짧은 떨림으로 자기 모양을 잃었다. 가운데가 옅어지고, 가장자리가 풀어지고, 자기를 새겼던 흐름이 거두어졌다. 넷째 갈래가 닫혔다.

행성의 하늘에 별 일곱 개가 남았다.

네 번째 역방향 박자가 행성의 하늘에 새겨졌다. 네 갈래가 닫혔고, 마지막 한 갈래가 남았다. 검정의 어머니가 계신 자리.

메르가 외투 안주머니에 손을 댔다. 노란 돌이 따뜻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어머니의 가락이 100년 동안 그 안쪽에서 흐르고 있었던 자취. 다섯째 갈래의 입구가 그 돌의 따뜻함에 닿으면 짚여 나올 것이었다.

KA가 폐허 한가운데에서 일행을 받아 들였다. 외피 안쪽에서 현우가 부드러운 가락으로 응답했다. 옛 친구 동현을 다시 만난 본체의 응답이었다. 두 사람이 다섯째 갈래에서 함께 닿게 될 두 어머니의 자취가, KA의 가락 안쪽에 가는 박자로 깔리기 시작했다.

옛 동방 황실의 폐허 너머로 옅은 노을이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일행이 한 갈래를 더 닫은 자리에서, 마지막 갈래로 옮겨 갈 준비가 끝나가고 있었다.

(27화에서 계속)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