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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학자의 본질/지리소설 메르카토르

제24화 — 동방의 옅은 노랑

by 덕지덕지 2026. 5. 21.

제24화 — 동방의 옅은 노랑

— 1 —

세 사람과 KA가 한울 부두에 돌아왔다.

다온이 어선을 부두에 묶고 짧게 인사를 건넸다. 어머니의 다음 세대로서 자기가 풀어 드린 자리들이 마무리되었다는 인사였다. 한울에 다시 들르실 일이 있으면 부두에서 차 한 잔 우려 드리겠다는 부드러운 한 마디로 마무리했다. 메르가 두 손을 모아 인사를 받았다. 다온의 어머니가 50년 전 메르 어머니에게 차 한 잔을 따라 주신 그 부둣가에서, 두 세대의 인사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이어졌다.

KA의 외피 안쪽에서 현우가 호흡을 가다듬은 채로 일행을 받아 들였다. 시현의 시신이 그대로 안치되어 있었다. 시현이 떠난 뒤 KA의 외피 안쪽은 한 자락 더 조용해져 있었지만, 그 조용함이 결손이 아니라 깊이로 자리잡고 있었다.

"넷째 갈래는 동방이라고 시현 분이 짚어 주셨지."

메르가 토르에게 작게 말을 건넸다.

"옅은 노랑의 자락. 동방의 결."

"바다 건너야 해?"

"한울 동쪽으로 사흘 거리에 옛 동방의 자취가 깔린 들판이 있다고, 어선에서 다온이 짚어 주셨어."

"KA로 사흘이면 멀지 않네."

토르가 답했다. 한 갈래씩 닫으며 옮겨갈수록, 일행의 다음 자리가 어디인지 자연스럽게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어머니의 50년 전 부탁이 다음 세대로 옮겨 간 자리가 점점 가까이 묶여 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 2 —

KA가 한울을 떠나 동쪽으로 미끄러졌다.

사흘이 사흘 같지 않았다. KA의 발자국이 부드러웠고, 평원의 풍경이 풀잎마다 다른 풀로 바뀌어 갔다. 한울의 회색 잔디가 평원의 푸른 잔디로, 푸른 잔디가 더 동쪽으로 갈수록 노란 자락이 섞인 잔디로 옮겨 갔다. 풍경이 자기 모양을 천천히 다음 풍경에게 내어 주는 모습이, 사람이 한 시절을 다음 시절에게 내어 주는 모습과 닮아 있었다.

사흘째 새벽, 풍경이 다시 트였다.

옅은 노랑의 들판이 사방으로 펼쳐져 있었다. 가을 들판이었다. 옛 한국의 가을 들판과 닮은 모양이었다. 보리가 익은 빛깔도, 벼가 익은 빛깔도 아닌, 그 두 빛깔 사이 어딘가의 옅은 노랑. 들판 사이사이에 가는 길이 한 줄씩 새겨져 있었고, 그 길 끝에 작은 마을이 있었다.

옛 한국 마을과 닮은 풍경이었다. 흙벽 집들. 초가지붕. 마을 한가운데에 큰 나무 하나, 그 옆에 우물 하나. 마을 입구에 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

50대로 보이는 여인이었다. 옅은 노란빛이 도는 흰 옷에 가는 청색 띠를 허리에 둘렀다. 머리를 길게 하나로 묶었고, 손에 작은 책 한 권을 들고 있었다. 책의 표지가 갈색 가죽이었다. 사람이 자기 자리에서 평생을 손에 책 한 권을 든 채로 머무는 모습이었다.

KA가 마을 입구 옆에 멎었다. 일행이 내렸다. 비익조가 메르의 어깨 위에서 작은 떨림으로 깃을 다듬었다. 이 마을의 가락이 평온하다는 신호였다.

여인이 일행 쪽으로 짧은 인사를 건넸다.

"오셨네요. 다온이 한 가락 보내 주셨어요. 어제부터 기다리고 있었고요."

"기다리고 계셨어요?"

메르가 물었다.

"네. 제 이름은 '하란'이에요. 옛 마을 도서관의 사서고요. 메르 어머님의 옛 친구 분의 따님입니다."

옛 도서관의 사서 하란이 자기 이름을 건넸다.

"메르예요. 옆에 토르, 서연이고요."

"세 분 다 환영합니다. 들어오세요. 도서관에서 차 한 잔 드리면서, 넷째 갈래의 풀이를 시작할게요."

— 3 —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니 큰 한옥이 한 채 있었다. 사람 키 두 배쯤 되는 처마, 깔끔하게 닦인 마루, 마루 너머 안쪽에 두꺼운 한지 미닫이 문. 미닫이 안쪽이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의 사방 벽이 책으로 채워져 있었다. 옛 한지로 묶인 책들. 표지마다 옛 한자가 한 자씩 새겨져 있었다. 책의 결이 옛 한국 종이의 결 그대로였다. 사람이 평생을 한 자리에서 닦아 온 결의 종이.

도서관 한가운데에 작은 차 탁자가 있었고, 그 옆에 가는 화로 하나, 화로 위에 차주전자 하나. 하란이 일행에게 자리를 권한 뒤, 차를 우렸다.

"옅은 노랑의 차예요. 동방의 가을 들판에서 자라는 옛 차의 맛이고요."

차가 따뜻했지만 시원했다. 한울의 청록 차와 또 다른 차였다. 차의 가락이 자기가 자란 들판의 햇빛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다시 짚였다.

"넷째 갈래의 풀이를 시작할게요."

하란이 차 한 모금을 마시고 입을 열었다.

"첫 갈래가 본체의 갈래였고요. 둘째 갈래가 시간의 갈래였고요. 셋째 갈래가 기억의 갈래였고요. 넷째 갈래는 다른 결이에요. 사람의 이름의 갈래입니다."

"이름이요?"

메르가 물었다.

"네. 사람이 자기를 가장 깊이 아는 자리가 이름이에요. 사람의 본체가 자기 모양이고, 시간이 자기 박자이고, 기억이 자기 자취라면, 이름은 자기를 다른 사람이 부르는 소리예요. 다른 사람이 부를 때 사람이 자기를 알아본다는 사실. 그것이 사람을 사람으로 살게 하는 가장 단순한 한 가지예요."

토르의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시현이 11화 다리에서 자기 이름을 자기 입으로 부를 수 있을 때까지 케이블을 끊지 못한 자라고 한 풀이가, 넷째 갈래의 첫 자리에 가락으로 깔리고 있었다. 이름이 자기를 알아본다는 사실이 사람의 마지막 자락이라는 시현의 한 마디가, 이 갈래에서 의식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비티움이 사람의 이름을 어떻게 가져가요?"

서연이 물었다. 서연은 자기 이름이 본래 자기 것이 아니었던 사람이었다. 비티움이 그릇으로 빚은 인형 안쪽에 어머니의 가락으로 자라난 자기 이름이 들어선 자리. 서연에게는 이름의 갈래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깊은 자기 자리였다.

하란이 차 잔을 잠시 내려놓았다.

"비티움이 사람의 이름을 가져갈 때, 그 사람의 이름이 다른 사람의 입에서 다른 발음으로 새어 나오기 시작해요.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처음에는 알아채기 어려운 작은 변화. 그러나 평생이 지나면, 그 사람의 본래 이름이 누구도 부르지 못하는 빈 자리가 되지요. 사람이 자기를 부를 수 없는 자리에 도달하면, 사람이 자기를 알아보지 못해요."

"넷째 갈래에 자리가 몇 개예요?"

메르가 물었다.

"셋이에요. 첫째가 이 마을의 옛 도서관. 사람들의 이름이 옛 책으로 보관되어 있는 자리고요. 둘째가 동방 산 위 비명원(碑名園). 사람들의 이름이 비석으로 새겨진 자리고요. 셋째가 넷째 갈래의 마지막 자리, 옛 동방 황실의 폐허예요."

"황실의 폐허요?"

토르가 물었다.

"옛 동방 황실이 100년 전 사라졌어요. 어머님 한 분이 그 사라진 자취 안쪽에 다섯째 갈래로 가는 열쇠 하나를 두고 가셨고요. 그 열쇠를 받으셔야 다섯째 갈래로 옮겨 가실 수 있어요."

— 4 —

하란이 차를 마저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서관의 안쪽 깊은 곳, 가장 두꺼운 책꽂이 옆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책꽂이의 가운데에 큰 책 한 권이 있었다. 사람 키의 절반쯤 되는 두꺼운 책. 표지가 짙은 갈색 가죽이었고, 표지 가운데에 옛 한자 한 자가 새겨져 있었다. 명(名).

"이 책이 사람들의 이름이 보관된 책이에요. 옛 동방의 모든 사람의 이름이 이 한 권 안쪽에 새겨져 있어요."

"한 권 안쪽에요?"

메르가 물었다.

"사람 하나의 이름이 한 줄이에요. 한 도시의 모든 사람이 한 장 안쪽에 들어가요. 한 나라의 모든 사람이 한 권 안쪽에 들어가지요. 한 도시의 평생이 한 장에 담긴다는 율 선생님의 풀이를 두 분이 들으셨지요? 이름도 같은 결이에요."

하란이 책의 표지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책이 가는 떨림으로 응답했다. 책의 안쪽 어딘가에서 작은 빛이 새어 나왔다.

"비티움이 50년 전부터 이 책의 안쪽에서 사람들의 이름을 한 자씩 흐려 가고 있어요. 메르 어머님께서 50년 전에 그 사실을 짚어 두고 가셨고요. 두 분이 오시면 책을 가지런히 풀어 드리라고요."

하란이 책을 두 사람 앞 탁자 위에 옮겨 놓았다. 일행이 책 옆에 가까이 다가갔다.

메르가 외투에서 검은 막대를 꺼냈다. 토르가 가슴 위에 손바닥을 댔다. 서연이 자기 가슴팍에 손바닥을 댔다. 세 사람의 도구가 책의 표지 위에서 한 박자에 만났다.

"같은 박자에."

세 사람의 말이 한 자리에서 모였다.

막대의 일곱 가닥, 토르의 두 빛, 서연의 어머니 가락이 책 표지의 명(名) 자 위에서 만났다. 책이 자기 안쪽을 열기 시작했다. 책의 안쪽 깊은 곳에서 비티움이 흐려 놓은 자리들이 한 줄씩 짚여 나왔다.

사람들의 이름이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빈 자리가 채워졌다. 책의 표지가 한 호흡 가지런해졌다.

"넷째 갈래의 첫 자리가 닫혔습니다."

하란이 짧게 끄덕였다.

도서관의 사방 벽이 노란 빛으로 한 결 따뜻해졌다. 책꽂이 안쪽의 모든 책들이 박자에 맞춰 가지런해졌다는 신호였다. 동방의 옛 책들이 자기 가락을 다시 찾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알려 드릴게요."

하란이 마루 너머 안쪽에서 시선을 옮겼다.

"비티움이 넷째 갈래에서 두 분께 보내는 자가 사람의 모양이 아니에요. 이름의 모양이에요."

"이름의 모양이요?"

메르가 물었다.

"두 분이 자기 안쪽 가장 깊은 곳에 모셔 두신 이름 하나가 사람의 목소리로 두 분 앞에 떠올라요. 그 이름을 받아들이지 마세요. 그 이름이 다른 자리에 모셔져 있는 본래 사람의 이름을 흐리려는 가락이거든요."

메르의 마음이 조용해졌다. 자기가 평생 마음 가장 깊은 자리에 모셔 둔 이름. 어머니의 이름. 그 이름이 사람의 목소리로 자기 앞에 떠오를 자리가 다음 거점에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19화의 가짜 어머니가 어머니의 모양으로 왔다면, 25화의 무엇은 어머니의 이름 자체로 다가올 것이었다. 모양은 거절할 수 있지만, 이름은 거절하기가 더 어렵다는 사실. 이름은 사람의 입에 직접 닿는 자락이라는 사실. 메르가 그 무게를 마음 안쪽에서 처음 받아 들였다.

차를 다 마신 일행이 도서관에서 일어났다. 하란이 짧은 인사로 다음 자리까지 안내해 주겠다고 일러 주었다. 비명원(碑名園)이 마을 동쪽 산 위에 있었다.

하늘에 별 여덟 개가 줄로 늘어선 채 일행의 등 위에 머물러 있었다. 넷째 갈래의 첫 자리가 닫혔고, 두 자리가 남아 있었다. 별의 무게가 한 호흡 더 가까이 깔리고 있었다.

KA가 마을 동쪽의 산길로 미끄러져 들어갈 준비를 했다. 옅은 노랑의 들판 너머에 동방의 옛 산이 그림자로 솟아 있었다.

(25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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