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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학자의 본질/지리소설 메르카토르

제25화 — 어머니의 두 이름

by 덕지덕지 2026. 5. 21.

제25화 — 어머니의 두 이름

— 1 —

하란이 일행을 마을 동쪽 산길로 안내했다.

도서관에서 산 입구까지 한 시간 거리였다. 마을의 옅은 노란 들판이 산자락의 짙은 갈색 자갈길로 옮겨 가고 있었다. 산은 높지 않았다. 사람 키 백 배쯤 솟은 옛 산이었지만, 산허리에 옛 한국의 작은 절터처럼 보이는 돌담이 한 자락 새겨져 있었다.

KA가 마을 입구에서 일행을 기다리겠다고 짧은 신호를 보냈다. 비명원은 사람의 발만 받아들이는 자리라고 하란이 짚어 주었다. 발자국 박자가 정해진 자리에서는 짐승의 발이 자기 가락을 흩는다.

세 사람과 비익조가 하란을 따라 산길을 올라갔다.

"비명원이 100년 전부터 있던 자리예요. 옛 동방 사람들이 자기 평생 이름을 비석에 새겨 두고 가신 자리고요. 살아 있는 동안 새기는 분도 계셨고, 돌아가신 뒤 자식이 새겨드리는 분도 계셨고요."

"평생 이름이라는 게 무슨 말씀이세요?"

서연이 물었다.

"사람이 평생 자기를 자기에게 부른 이름. 부모가 지어준 이름과 다를 수도 있어요. 한 사람이 자기 평생을 살면서 가슴 안쪽에서 자기를 부르는 이름을 새로 짓는 일이 동방의 옛 관습이었지요. 그 이름은 자기만 알고, 평생을 살면서 그 이름으로 자기를 부드럽게 부르는 일을 한 사람의 신앙으로 두었어요."

메르의 마음이 조용해졌다. 자기 어머니가 한 평생 자기를 어떻게 가슴 안쪽에서 부르셨을지를 차분히 떠올려 보았다. 자기가 늘 부르던 "엄마", 학자로서의 "김선영" 외에, 어머니가 자기를 자기에게 부른 또 다른 이름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 12년 동안 어머니의 부재를 안고 살았지만, 어머니의 그 본래 이름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 2 —

산허리의 작은 돌담 안쪽이 비명원이었다.

옛 한국 사림원과 닮은 풍경이었지만, 더 단정하고 더 가지런했다. 사람 키 정도 솟은 비석들이 줄로 늘어서 있었고, 비석마다 사람 한 명의 옛 한자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비석의 색이 짙은 회색이었다. 옛 사람의 평생을 받아 들인 돌의 빛깔.

비석들 사이에 길이 가는 줄로 나 있었고, 길 끝에 작은 정자가 한 채 있었다. 정자 옆에 한 사람이 손에 가는 정과 망치를 든 채로 서 있었다.

60대로 보이는 남자였다. 짙은 회색 옷에 가는 흰 띠를 어깨에 둘렀다. 머리가 짧고, 양손에 가는 흰 장갑을 꼈다. 비명원지기인 모양이었다.

하란이 일행을 정자 쪽으로 안내했다.

남자가 정과 망치를 정자 옆에 내려놓고 일행 쪽으로 다가왔다. 한 평생 비석에 사람의 이름을 새겨 온 사람의 손이 거칠었지만, 사람의 이름을 평생 다듬은 손답게 차분한 손이었다.

"오셨네요. 하란이 한 가락 보내 주셨고요. 어제부터 기다리고 있었어요. 제 이름은 '석운'이고, 돌 구름이라는 뜻입니다. 비명원의 옛 비석들을 평생 닦아 온 사람이고요."

비명원지기 석운이 자기 이름을 건넸다.

세 사람이 자기 이름을 차례로 건넸다. 석운의 시선이 메르 쪽으로 잠시 머물렀다.

"어머님 비석이 안쪽에 있어요. 안내해 드릴게요."

메르의 호흡이 멎었다.

"어머님 비석이라뇨?"

"어머님께서 50년 전에 자기 이름을 두 자루 비석에 새기고 가셨어요. 메르 양이 도착하시면 그 비석들을 보여 드리라고요. 어머님의 마지막 부탁이었지요."

— 3 —

석운이 비명원 안쪽 깊은 곳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비석들 사이를 한참 지나, 비명원 가장 안쪽 자리에 두 비석이 나란히 서 있었다. 한 비석은 다른 비석보다 절반쯤 더 컸다.

석운이 큰 비석 옆에 멎었다.

"이것이 어머님의 첫 비석이에요. 자기 사람 이름을 새기신 비석이고요."

메르가 비석 옆으로 다가가 안쪽 한자를 짚어 봤다.

金善榮

김선영. 메르가 12년 동안 가슴에 안고 살았던 어머니의 본래 이름. 학자로서, 어머니로서, 메르의 어머니로서 가지신 이름. 그 한자가 비석에 깊게 새겨져 있었다. 글자의 깊이가 한 평생을 살아 낸 사람의 무게로 남아 있었다.

메르의 눈가가 젖었다. 어머니의 이름이 비석에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 어머니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메르가 알았지만, 그래도 그 이름을 비석 위에서 처음 보는 일은 마음이 한 결 가라앉는 자리였다. 사람의 이름이 종이가 아니라 돌에 새겨진 일은, 그 사람의 자취가 시간의 흐름보다 더 오래 머무를 자리에 놓였다는 신호였다.

"두 번째 비석은 무엇이에요?"

메르가 옆 작은 비석을 가리키며 물었다.

석운이 두 번째 비석 옆으로 옮겨 갔다.

"어머님께서 자기 평생 의식 이름을 새기신 비석이에요. 동방의 옛 관습이지요. 한 사람이 자기 평생을 사는 동안 자기를 자기에게 부른 이름. 부모가 지어주신 이름과 다른, 자기가 자기에게 지어준 이름이고요."

메르가 두 번째 비석 안쪽 한자를 짚어 봤다.

緖景

서경. 가닥의 풍경이라는 뜻. 어머니가 자기 평생 자기를 자기에게 부른 이름.

메르가 그 이름을 처음 보았다. 평생 듣지 못한 어머니의 또 다른 이름. 어머니가 가슴 안쪽에서 자기를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었고, 그것이 "서경"이었다는 사실. 어머니가 한 평생 메르카토르의 의식을 풀어내는 일을 하시면서, 자기를 자기에게 그 이름으로 부드럽게 부르고 사셨다는 사실.

"서경."

메르가 입 안에서 작게 그 이름을 굴려 봤다. 자기가 어머니를 처음으로 어머니의 본래 이름으로 부른 자리였다. 12년 동안 어머니를 "엄마"로만 부른 자식이, 어머니가 가슴 안쪽에서 자기를 부른 이름을 처음으로 입 밖으로 옮긴 자리.

석운이 끄덕였다.

"잘 부르셨어요. 어머님이 그 이름을 들으셨을 거예요. 다섯째 갈래에 가까이 가실수록, 어머님께서 두 분의 가락을 더 옅게 들으실 수 있어요."

— 4 —

비명원 안쪽 어딘가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처음에는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비석들 사이의 어느 자리에서 시작된 목소리. 사람의 목소리였지만, 비명원의 공기를 통해 옅게 새어 나오는 결이었다.

"서경아."

메르의 호흡이 다시 멎었다.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19화 광산에서 들었던 가짜 어머니의 목소리와 닮았지만, 더 깊고 더 안쪽의 목소리였다. 어머니가 다른 사람을 부를 때의 목소리가 아니라, 어머니가 자기를 자기에게 부르던 그 가락의 목소리.

"서경아. 옆에 있어 줘."

메르의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어머니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일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지 않는 일이다. 그 목소리가 비명원 어딘가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석운이 옆에서 작은 목소리를 보탰다.

"비티움이에요, 메르 양. 어머님의 의식 이름을 어머님의 목소리로 부르고 있어요. 메르 양이 그 부름에 응답하시면, 어머님의 본래 이름의 자리가 비티움 쪽으로 옮겨 가요. 어머님께서 자기를 자기에게 부드럽게 부르신 그 이름이 비티움의 자리로 빨려 들어가요."

"제가 어떻게 막아요?"

메르가 짧게 물었다.

"메르 양이 어머님의 이름을 어머님 대신 부드럽게 불러 주세요. 어머님께서 자기에게 부른 그 가락으로요. 자식의 입에서 어머니의 본래 이름이 부드럽게 불려 나오면, 비티움이 그 이름의 자리에 닿지 못해요."

메르가 토르를 보았다. 서연을 보았다. 두 사람이 메르의 양손을 잡았다. 19화, 21화, 22화에서 같은 자세 그대로. 같은 박자에, 같은 무게로.

메르가 어머니의 의식 비석 옆에 무릎을 꿇었다. 손바닥을 비석의 한자 위에 댔다. 한자의 깊이가 손바닥 안쪽으로 흘러들었다. 어머니가 자기 평생 그 이름으로 자기를 부른 가락이 손바닥 너머에서 짚였다.

메르가 작게 입을 열었다.

"서경아."

자기 어머니의 본래 이름을 자기 입으로 처음 부른 자리였다. 부드럽게. 어머니가 자기를 자기에게 부른 그 가락 그대로.

비명원 어딘가에서 새어 나오던 가짜 목소리가 한 호흡 멎었다.

메르가 다시 한 번 작게 불렀다.

"서경아."

가짜 목소리가 가는 가닥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본래 이름이 메르의 입에서 부드럽게 불려 나온 자리에서, 비티움이 자기 자리를 잃어 가고 있었다. 자식이 어머니의 가장 깊은 이름을 자기 입으로 부드럽게 부를 수 있는 자리에 도달했을 때, 그 자식과 어머니 사이의 가락이 비티움보다 더 단단해진다는 사실. 이름이 사람과 사람을 묶는 가장 깊은 자락이라는 하란 선생님의 풀이가, 이 자리에서 또렷이 짚이고 있었다.

메르가 외투에서 검은 막대를 꺼냈다. 토르가 가슴 위에 손바닥을 댔다. 서연이 자기 가슴팍에 손바닥을 댔다.

"같은 박자에."

세 사람의 도구가 어머니의 의식 비석 위에서 모였다. 막대의 일곱 가닥, 토르의 두 빛, 서연의 어머니 가락이 박자에 맞춰 만났다. 비석의 한자가 한 결 더 또렷이 짚여 나왔다. 비티움의 가짜 목소리가 비명원 바깥쪽으로 완전히 흩어졌다.

"넷째 갈래의 둘째 자리가 닫혔습니다."

석운이 짧게 끄덕였다.

메르가 비석 옆에서 일어났다. 손바닥에 어머니의 의식 가닥이 남아 있었다. 그 가닥이 평생 자기 가슴 안쪽에서 흐를 거라는 사실. 어머니의 또 다른 이름 하나를 평생 가슴에 모셔 둘 자리가, 25화의 비명원에서 새로 생겨났다.

석운이 일행에게 다음 자리를 일러 주었다. 옛 동방 황실의 폐허가 비명원 동쪽의 더 깊은 산 너머에 있었다. 어머니가 100년 전 두고 가신 다섯째 갈래의 열쇠가 그 폐허의 어느 자리에 묻혀 있다고 했다.

"황실의 폐허에는 누가 계세요?"

토르가 물었다.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100년 전 사라진 자리니까요. 다만 어머님께서 두고 가신 열쇠 옆에 비티움의 마지막 사람이 한 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마지막 사람이요?"

메르가 물었다.

"비티움이 사람의 모양으로 보내는 마지막 자입니다. 이름의 모양도, 본체의 모양도, 시간의 모양도 아니에요. 본인의 모양이지요."

"비티움 본인의 모양이라뇨?"

토르가 다시 물었다.

석운이 잠시 답을 미루었다. 사람이 자기 입에 굴려 본 적 없는 말을 처음 옮기는 사람의 미룸이었다.

"비티움이 본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두 분께서 황실의 폐허에서 받아들이시게 될 거예요. 그것이 다섯째 갈래로 가는 열쇠고요."

메르의 마음이 깊이 가라앉았다. 비티움이 본래 사람이었다는 사실. 어머니의 적이 처음부터 적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풀이. 다섯째 갈래의 열쇠가 그 사실 안쪽에 묻혀 있다는 짚음.

하늘에 별 여덟 개가 줄로 늘어선 채 일행의 등 위에 머물러 있었다. 넷째 갈래의 두 자리가 닫혔고, 마지막 자리가 남아 있었다. 별의 무게가 한 호흡 더 가까이 깔리고 있었다.

메르의 외투 안주머니에 새 짐이 들어왔다. 어머니의 의식 비석에서 짚어 받은 가락 한 자락. 짐이지만 짐이 아니었다. 평생 어머니를 한 이름으로만 부른 자식이, 어머니의 본래 이름을 손바닥 안쪽에 한 자락 받아 든 무게였다.

(26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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