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 검은 호수의 옛 부두
동현이 거두어 간 단상 위로 옅은 자줏빛 노을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메르가 외투 안주머니에서 노란 돌을 꺼냈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자 돌의 표면이 따뜻하게 응답했다. 어머니가 100년 전에 묻어 두신 자취가 손바닥 안쪽으로 흘러들었다. 돌의 가운데에서 가는 빛 한 줄기가 솟아올라 폐허 너머 어느 방향으로 가지런히 뻗어 갔다. 다섯째 갈래의 입구를 짚어 주는 흐름이었다.
"북동쪽이야."
메르가 작게 말했다.
"폐허 너머 산자락 더 깊은 곳."
토르가 옆에서 받아 받았다. 서연이 두 사람 옆에서 손바닥을 폐허의 너머 쪽으로 폈다. 어머니의 가락이 자기 안쪽에서 그 방향으로 부드럽게 잡아당기는 느낌이 든다고 짧게 짚어 주었다.
세 사람이 KA로 옮겨 탔다. 외피가 산길을 가는 발자국으로 다시 다듬어졌다. 일행이 황실 폐허를 떠나 산자락의 더 깊은 안쪽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갔다.
산자락은 한 시간을 더 들어가는 동안 풍경의 무게를 차츰 다른 종류로 바꾸어 갔다. 처음에는 동방의 옅은 노란 가을 들판이 등 뒤에서 사라지더니, 옅은 갈색 자갈길이 짙은 갈색 흙길로 옮겨 갔고, 흙길 양옆의 풀잎이 빛깔을 한 켜씩 어둡게 잃었다. 마지막 한 켜는 검정에 가까웠다. 풀잎 위에 사람의 발자국이 한 자국도 새겨지지 않은 자리였다. 사람이 자기 발을 놓지 않은 땅이 본래 가지는 침묵이 사방에 깔려 있었다.
산자락의 정상 너머에서 풍경이 한 번 더 트였다. 짙은 안개가 사방을 덮고 있었고, 그 안개 너머에 검은 호수가 놓여 있었다.
검은 호수의 표면이 거울 같았다.
바람이 한 점도 일지 않았다. 호수가 자기 안쪽으로 어떤 흐름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듯, 표면이 단단하게 닫혀 있었다. 색은 검정이라기보다 짙은 군청에 가까웠지만, 그 군청에 어두운 자줏빛이 한 겹 깔려 있어 사람의 눈을 한 호흡 마비시키는 무게로 다가왔다. 호수의 한가운데가 어디인지, 호수의 반대편 기슭이 얼마나 먼지, 안개에 가려 가늠되지 않았다.
호숫가 옆 자갈밭에 옛 부두 하나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사람 키 정도 길이의 작은 나무 부두. 부두 끝에 가는 등불 하나가 켜져 있었다. 사람이 한 평생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등불을 지켜 온 자취였다.
등불 옆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인이었다. 흰 머리를 귀 끝까지 짧게 잘랐고, 검은 외투를 어깨까지 두른 채 다리를 모아 부두 위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손에 옛 등불을 받쳐 들고 있었는데, 손가락이 길고 가늘었다. 오랜 세월 호숫가에서 살아온 사람답게 손가락 끝이 가늘게 닳아 있었다. 사람의 손이 한 평생 한 가지 일에 깎여 가면 그 손은 평범한 사람의 손과 다른 무게를 가진다. 그 무게가 첫눈에 또렷이 짚이는 손이었다.
메르가 KA에서 내려 자갈밭 위에 발을 디뎠다. 자갈이 발 아래에서 부드럽게 부서졌다. 발자국이 가지런히 새겨지지 않고, 한 호흡 뒤에 형태가 흐려졌다. 다섯째 갈래의 땅이 사람의 자취를 오래 머무르게 두지 않는 결이라는 사실을 메르가 한 발자국 만에 알아차렸다.
여인이 일행 쪽으로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미소가 입가에 어렴풋이 떠올랐다 다시 가라앉았다. 사람이 자기를 50년 만에 다시 마주하는 손님을 맞이할 때 짓는 미소가 그러했다.
"오셨네요."
여인이 짧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가늘었지만, 그 가는 목소리 안쪽에 깊은 우물 같은 침묵이 같이 흐르고 있었다.
"기다리고 계셨어요?"
메르가 물었다.
"50년이지요. 어머님들께서 이 부두에서 호수로 들어가시던 그날부터 매일이요. 두 분의 자식이 두 분과 같은 부두에 서시는 날을 기다렸어요. 제 이름은 '심하'예요. 깊은 강이라는 뜻입니다. 호수 부두를 평생 지킨 사람이고요."
호수 부두의 옛 등불지기 심하가 자기 이름을 건넸다.
세 사람이 자기 이름을 차례로 답했다. 심하의 시선이 메르 쪽에서 한 호흡 멎었다. 어머니의 자취가 자식의 얼굴에서 짚이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토르 쪽으로 옮겨 가서도 같은 멎음이 있었다. 두 어머니의 자취가 동시에 자기 앞 두 자식의 얼굴에서 짚이는 일을 50년 만에 처음 마주하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어머님들과 닮으셨네요. 두 분 다."
심하가 천천히 일어섰다. 외투 자락이 자갈 위에 부드럽게 끌렸다. 옛 등불을 자기 가슴 앞에 가지런히 모아 든 채로 일행 쪽으로 한 발자국 다가왔다.
"부두에 앉아서 차 한 잔 드릴게요. 다섯째 갈래의 풀이를 시작하면서요."
부두 끝의 작은 화로에서 검은 차가 우려졌다. 영서 등대의 검은 차와 비슷한 빛깔이었지만, 향이 더 깊고 더 무거웠다. 차의 가락이 호수의 안개를 한 호흡씩 머금은 결이었다.
심하가 일행에게 잔을 한 잔씩 따라 주었다. 자기 잔도 옆에 채웠다. 등불의 빛이 차 잔의 표면에서 가는 떨림으로 흔들렸다.
"다섯째 갈래의 풀이를 시작할게요. 네 갈래의 풀이를 두 분이 다 받아들이셨으니, 마지막 갈래의 풀이를 어렵게 받아들이지 않으실 거예요."
심하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동현 선생님께서 한 가지를 풀어 주셨지요? 비티움이 사람의 안쪽에서 자라난 자취라고요."
"네."
메르가 답했다.
"이 호수가 비티움이에요."
심하가 손끝으로 호수의 표면을 가리켰다. 메르의 호흡이 한 호흡 늦어졌다. 토르의 가슴 안쪽에서 흰빛과 검은빛이 두 가닥으로 흔들렸다.
"호수가요?"
서연이 짧게 물었다.
"네. 호수의 안쪽에 옛 도시가 한 채 잠겨 있어요. 비티움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도시지요. 그러나 그 도시는 사람의 도시가 아니에요. 사람들이 자기 안쪽에서 외면한 자취가 한 평생을 지나 모인 자리예요. 누가 만든 도시가 아니라, 사람들이 한 사람씩 한 호흡씩 가라앉힌 자취가 호수 바닥에 쌓여서 도시의 모양을 갖추게 된 거지요."
심하가 잠시 차 잔을 들여다보았다. 차의 표면이 검은 거울처럼 자기 얼굴을 비치고 있었다.
"호수의 표면이 거울이라는 사실을 보셨지요? 호수가 사람을 비춰요. 그러나 호수가 비추는 사람은 호수 앞에 선 사람의 바깥이 아니에요. 그 사람이 자기 안에서 외면한 자기 자취예요. 호수의 표면을 들여다보시면, 두 분이 한 평생 외면한 두 분의 자취가 보일 거예요."
"외면한 자취가 무엇인지 보면, 우리는 어떻게 해요?"
토르가 차분히 물었다.
"그 자취를 외면하지 않으세요. 그것이 다섯째 갈래의 풀이예요. 한 평생 외면한 자기를 처음으로 정면으로 마주 보시는 일. 그 마주 봄이 한 자리를 닫는 가락이고요. 호수의 첫 자리, 둘째 자리, 셋째 자리가 그 마주 봄으로 닫혀요. 마지막 넷째 자리에서 두 어머님께 닿으시고요."
메르가 호수의 표면을 한 번 더 들여다보았다. 한 호흡 들이마시는 사이에 호수의 표면이 자기 얼굴을 또렷이 비추고 있다는 사실이 다가왔다. 그러나 그 얼굴이 자기가 거울에서 매일 보아 온 얼굴이 아니었다. 같은 사람의 얼굴이지만, 한 호흡 더 깊은 무엇이 같이 비치고 있는 얼굴.
"심하 선생님, 어머님들께서 50년 동안 무엇을 하고 계셨어요?"
메르가 짧게 물었다.
"두 분이 한 평생 외면한 자기 자취를 호수 안쪽에서 한 호흡씩 안아 들이고 계셨어요. 50년이 그 일에 든 시간이고요. 어머니가 자식을 두고 떠난 일은 한 사람이 평생 외면해야 할 가장 무거운 자취예요. 어머님들께서 그 자취를 50년 동안 안쪽에서 안아 들이셨어요. 두 분의 자식이 두 분께 닿을 때까지요."
메르의 가슴 한복판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머니가 자기를 떠나신 일이 어머니에게 어떤 무게였는지를, 메르가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또렷이 짚었다. 자식의 입장에서 보면 어머니가 자기를 두고 가신 12년이었지만, 어머니의 입장에서 보면 자식을 두고 가신 50년이었다. 자식이 잃은 12년보다 어머니가 잃은 50년이 더 길고 더 무거운 자취였다. 자식이 견뎌야 했던 부재보다 어머니가 견뎌야 했던 부재가 평생을 두고 더 큰 짐이었다는 사실. 메르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 12년이 걸린 셈이었다.
심하가 차 잔을 부두 위에 내려놓았다. 등불을 들어 호수의 표면을 한 발자국 옆에서 비추었다.
"첫 자리부터 시작하시지요. 메르 양께서 한 평생 외면한 자기 자취가 호수의 표면에 짚여 나올 거예요."
메르가 부두의 끝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호수의 표면이 발 아래에서 단정하게 펼쳐져 있었다. 토르와 서연이 양옆에 자리를 잡았다. 비익조가 메르의 어깨에서 가는 떨림으로 호흡을 맞춰 주었다.
호수의 표면이 메르의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기의 평소 얼굴이었다. 26살의 메르, 학자의 얼굴. 그러나 그 얼굴 안쪽에서 다른 얼굴이 한 켜씩 떠올랐다. 12년 동안 자기가 외면한 자기의 얼굴들. 어머니의 부재 앞에서 자기를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외면한 자기의 약한 자락들.
학교에서 친구가 자기에게 "엄마는?"이라고 물었을 때, 답을 미루고 자리를 떠난 14살의 메르. 친척 결혼식에서 친척 어른이 자기 어머니 이야기를 꺼냈을 때, 차분히 웃으면서 화제를 옮긴 17살의 메르. 박사 과정 면접에서 면접관이 가족 사항을 물었을 때, 어머니가 안 계시다고만 짧게 답하고 다음 질문을 기다린 23살의 메르.
그 모든 자리에서 메르는 자기 가슴 안쪽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는 사실을 외면해 왔다. 어머니가 안 계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과, 어머니가 그리워서 가슴이 무거워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다른 일이었다. 첫 번째 일은 12년 동안 차근차근 받아들여 왔다. 두 번째 일은 12년 동안 한 호흡도 받아들이지 못한 채로 살아왔다.
메르의 눈가가 천천히 젖었다.
호수의 표면이 그 그리움의 자취를 한 켜씩 비추어 주고 있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밤에 베개에 얼굴을 묻은 14살의 메르. 어머니가 부엌에서 콧노래를 부르시던 그 새벽이 그리워서 라면 끓는 소리에 잠시 멎은 17살의 메르. 어머니의 책장에서 어머니의 옛 책 한 권을 꺼내 한참 들여다본 23살의 메르.
"그리워해도 돼."
메르가 호수의 표면을 들여다보며 작게 말했다. 자기가 자기에게 12년 만에 처음으로 허락하는 한 마디였다.
"엄마가 보고 싶어. 12년 동안 매일 보고 싶었어. 그 사실을 외면 안 해도 돼."
호수의 표면이 잠시 떨었다. 메르가 자기 안쪽에서 외면해 온 자취 하나가 거두어진 자리. 한 평생 외면한 자기를 자기 입으로 처음 안아 들인 자리. 호수의 검은 표면에서 옅은 자줏빛 한 줄기가 가는 가닥으로 솟아올라 메르의 손바닥 쪽으로 부드럽게 흘러왔다. 외면이 거두어진 자리에서 그 자취가 사람의 자락으로 돌아온 신호였다.
메르가 외투에서 검은 막대를 꺼냈다. 토르가 가슴 위에 손바닥을 댔다. 서연이 자기 가슴팍에 손바닥을 댔다. 세 사람의 도구가 호수의 표면 위에서 박자에 맞춰 만났다. 막대의 일곱 가닥, 토르의 두 빛, 서연의 어머니 가락이 호수 위 자줏빛 가닥에 닿았다. 가닥이 부드럽게 거두어졌다. 그 자리에서 호수의 표면이 한 호흡 가지런해졌다.
"다섯째 갈래의 첫 자리가 닫혔습니다."
심하가 짧게 끄덕였다.
메르의 마음 안쪽이 처음으로 가벼워졌다. 12년 동안 가슴에 안고 있던 무게가 한 켜씩 풀려 나가는 결이었다. 그리움을 외면하지 않고 안아 들이는 일이 그리움을 더 무겁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그리움을 자기 자리에 가만히 놓아 두는 일이라는 사실. 어머니가 50년 동안 호수 안쪽에서 하신 일이 그 일이었다는 사실을, 메르가 자기 가슴으로 비로소 알게 됐다.
"한 가지 알려 드릴게요."
심하가 부두 끝에서 등불을 다시 들었다.
"다섯째 갈래는 다른 갈래들과 다른 자리예요. 별이 닫히지 않아요. 첫 자리가 닫혀도, 둘째 자리가 닫혀도, 마지막에 어머님들께 닿으셔도, 별 일곱 개가 그대로 머물러 있어요."
"왜요?"
토르가 물었다.
"별의 닫힘은 갈래의 닫힘이지요. 그러나 다섯째 갈래는 닫는 갈래가 아니에요. 안아 들이는 갈래예요. 사람이 자기 안의 외면을 안아 들일 때, 그 외면이 닫히는 게 아니라 자기 자리로 돌아가요. 마지막에 두 분이 어머님들께 닿으시는 일도 어머님들을 닫는 일이 아니라 어머님들을 안아 들이는 일이고요."
"그러면 별은 언제 다 닫혀요?"
메르가 짧게 물었다.
"천계와 지옥계의 의식이 끝날 때요. 그러나 그때 별이 닫히는 결도 우리가 아는 닫힘과 달라요. 별의 검은 점들이 하늘에서 다른 빛으로 바뀌어요. 별이 사람의 두려움을 받아들이는 자리에서, 사람의 다정함을 받아들이는 자리로 옮겨 가요. 그 변화가 의식의 마지막 자락이에요."
메르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봤다. 검정의 호수 위로 별 일곱 개가 변함없이 줄로 늘어선 채 머물러 있었다. 다섯째 갈래의 첫 자리가 닫혔지만, 별은 그대로였다. 심하의 풀이가 정확했다.
호수의 안개 너머 어딘가에서 옛 도시의 가는 윤곽이 한 켜 짚여 나왔다. 어머니들이 50년을 머무신 자리가, 한 호흡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부두의 등불이 호수의 표면 위에 가는 빛 한 줄을 새겼다. 다섯째 갈래의 첫 자리에서 둘째 자리로 옮겨 갈 가락이 그 빛 한 줄 위에서 부드럽게 깔리고 있었다.
"내일 새벽에 호수 안쪽으로 들어가시지요. 제가 작은 배로 안내해 드릴게요. 오늘 밤은 부두 옆 작은 집에서 쉬셔도 됩니다."
심하가 등불을 옆에 내려놓고 일행에게 작은 인사를 건넸다.
밤이 호수 위로 천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자줏빛 노을이 검정의 표면 위에서 한 호흡씩 가라앉고 있었다. 일행이 부두의 작은 집 쪽으로 발을 옮겼다. 한 갈래를 더 풀어내기 전의 마지막 휴식이 시작되고 있었다.
(28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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