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화 — 작은 배의 노 젓기
호수 위로 새벽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밤사이에 안개가 한층 더 짙어져 있었다. 부두에서 호수 안쪽까지의 거리가 한층 가까워 보이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더 멀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안개는 사물의 거리를 사람의 눈에서 빼앗아 가는 존재였다. 빼앗긴 거리는 사람의 마음 안쪽에서 새로 재구성되었고, 그 재구성은 늘 실제보다 더 큰 두려움으로 부풀려졌다. 부두의 끝에서 앞을 응시하던 메르는 그 사실을 학자의 머리로 알고 있었지만, 안다는 사실이 두려움을 덜어주지는 않았다.
심하가 부두 옆 자갈밭에 매여 있던 작은 배의 줄을 풀었다. 옛 한국의 강배와 닮은 모양이었다. 길이가 사람 키 두 배쯤. 폭이 좁고, 양쪽 끝이 살짝 들려 있었으며, 가운데에 두꺼운 노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배의 옆구리에 검은 칠이 입혀져 있었다. 호수의 검정과 잘 어우러져, 안개 속에서 배가 출발하면 어느 자리에서 사람의 눈에 사라질지 가늠하기 어려운 결이었다.
"세 분과 비익조까지 같이 타시면 됩니다. KA는 부두에서 기다리고 있어 주세요."
심하가 작게 안내를 건넸다.
"KA는 호수 안쪽으로 못 들어가요?"
토르가 짚어 물었다.
"호수의 안쪽은 사람의 외면이 모인 자리예요. 짐승의 외면은 다른 결로 모이지요. KA가 옆에 같이 가면 KA의 가락이 호수의 가락과 한 자리에서 부딪혀요. 그 부딪힘이 자기 외면을 마주하시는 두 분의 자취를 흐릴 수 있어요."
KA가 부두 옆에서 외피를 작게 다듬으며 응답했다. 자기가 부두에서 일행을 기다리겠다는 신호였다. 외피 안쪽에서 현우가 가는 무게로 가락을 보냈다. 본체가 자기 사람의 가장 깊은 자리에 같이 가지 못하는 일이 본체에게 어떤 종류의 적적함을 남기는지를, 그 가락의 결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본체는 적적함을 입 밖으로 옮기지 않았다. 자기 사람이 자기 자리를 옳게 풀어내고 돌아오기를 부두에서 묵묵히 기다리는 일이, 자식을 키운 어머니 한 분에게는 50년의 의식과 다르지 않은 무게였을 것이었다.
세 사람과 비익조가 작은 배에 올라탔다. 메르가 뱃머리에, 서연이 가운데에, 토르가 뱃꼬리에 자리를 잡았다. 심하가 노 두 자루를 양손에 받쳐 들고 배의 가운데에 앉았다. 안개가 부두를 한 켜씩 등 뒤로 옮겨 가고 있었다.
노가 호수의 표면을 처음 갈랐다. 물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호수의 물이 보통의 물보다 무거운 결이었다. 노의 끝이 표면을 내리쳤다 들어 올릴 때, 그 자리에서 자줏빛 가닥이 가는 결로 새어 나왔다가 다시 표면 안쪽으로 거두어졌다.
배가 안개의 한가운데로 옮겨 갔다.
사방의 시야가 어두웠다. 부두는 등 뒤에서 사라졌고, 호수 반대편의 옛 도시는 안개 너머에서 짚이지 않았다. 사람이 안내자 한 분에게 자기 길을 모두 맡긴 채로 옮겨 가는 자리. 심하의 노 박자만이 일행의 옮김을 안내하고 있었다. 노의 박자는 사람의 박동과 닮아 있었다. 한 번 내리치고, 잠시 멎고, 다시 한 번 내리치는 결.
토르가 뱃꼬리에서 호수의 표면을 들여다보았다.
표면이 토르의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른 토르의 얼굴. 가슴의 흰빛 한 줄기가 표면 위에서 자기 모습대로 짚여 나왔다. 그러나 그 얼굴 안쪽에서 다른 얼굴들이 한 켜씩 새로 떠올랐다. 50년 동안 토르가 외면해 온 자기의 자취들이었다.
두 살의 토르가 어머니 옷자락을 마지막으로 잡았던 자리는 22화 모래섬에서 마주 봤다. 그 자리가 토르의 가장 먼 외면이었지만, 그 자리만 외면해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호수의 표면이 짚어 주고 있었다. 두 살부터 50년 동안 토르의 평생에 외면이 한 자리, 한 자리, 또 한 자리씩 쌓여 있었다.
다섯 살 때 마을 다른 아이들이 자기 부모와 손을 잡고 우물가에 나오는 모습을 보고도 한 호흡 만에 자리를 옮긴 토르. 일곱 살 때 큰어른이 자기 머리 위에 손바닥을 얹어 주셨을 때, 그 손바닥이 어머니의 손바닥과 다른 결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다름을 한 호흡 만에 잊으려 한 토르. 열두 살 때 마을의 다른 아이가 자기에게 어머니 이야기를 묻자, 자기 어머니가 어떤 분이셨는지 한 마디도 답하지 못한 자리에서 그 침묵 자체를 외면해 버린 토르.
스무 살 무렵, 자기가 처음으로 사슴 한 마리의 마지막 숨에 가슴 빛을 옮겨 주었을 때, 그 사슴이 자기 어머니가 가지셨을 마지막 호흡과 닮은 결이 있다는 사실을 짚으면서도, 그 닮음을 한 호흡 만에 외면해 버린 토르. 30대 중반에 마을의 큰어른께서 자기 어머니 이야기를 처음 풀어 주려 하셨을 때, 자기가 입을 다물고 다음 사슴을 잡으러 능선으로 나가 버린 토르.
50년 동안 토르가 외면해 온 자기 자취가 호수의 표면 위에서 한 켜씩 떠올랐다. 외면의 자리마다 토르의 가슴 안쪽 흰빛이 한 가닥씩 옅어져 있었다. 자기 어머니의 가장 깊은 자취를 자기에게 허락하지 않고 살아온 50년이, 자기 가슴의 흰빛을 한 평생 한 가닥씩 옅게 만들어 왔다는 사실. 14화 펜타곤 깊은 곳에서 현우 본체가 자기 가닥을 끊어 주신 뒤로 토르의 가슴에 검은빛이 새로 자라났지만, 흰빛이 평생 어떻게 옅어져 있었는지를 토르가 마주한 자리는 28화의 이 호수 위가 처음이었다.
"어머니."
토르가 작게 자기 입 안에서 한 단어를 굴려 봤다. 한 평생 자기가 자기에게 허락하지 않은 한 마디였다. 자기 어머니를 자기 입으로 부른 일이 두 살 이후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 큰어른께서는 "어머님"이라 부르셨고, 마을 사람들도 "그 분"이라 짚어 주셨다. 토르 자신이 자기 입으로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른 일은 50년 동안 한 번도 없었다.
"어머니."
토르가 다시 한 번 부드럽게 발음했다.
"보고 싶었어요. 50년 동안 매일 보고 싶었어요. 그 사실을 50년 동안 외면해 왔는데, 외면 안 해도 되는 거였네요. 어머니가 저를 두고 가신 일이 어머니의 결심이었던 만큼, 제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일도 자식의 결심이어도 되는 거였어요."
토르의 눈가가 천천히 젖었다. 50년 만에 처음으로 자기 가슴 안쪽에서 자기를 어머니의 아들로 허락하는 자리였다. 어머니가 자기를 두고 가신 결심은 자기가 평생 받아들여 온 사실이었지만, 자기가 어머니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50년 동안 외면해 온 자취였다. 어머니의 아들로 자기를 받아들이면, 어머니의 부재가 자기 가슴에 더 깊이 새겨질 것이라고 두 살의 자기가 결심한 자리가 있었다. 그 결심이 50년 동안 자기 어머니를 자기에게서 멀리 두는 결심이었다.
호수의 표면 위에서 옅은 검은빛 가닥이 솟아올라 토르의 가슴 쪽으로 부드럽게 흘러왔다. 외면이 거두어진 자리에서 그 자취가 사람의 자락으로 돌아오는 결이었다. 27화 메르의 자리에서 자줏빛이 흘러왔던 것과 같은 결이었지만, 빛깔이 옅은 검정이었다. 토르의 가슴 안쪽 검은빛과 한 자리에서 만난 자취였다.
메르가 외투에서 검은 막대를 꺼냈다. 서연이 자기 가슴팍에 손바닥을 댔다. 두 사람이 토르의 자취를 옆에서 받쳐 들고 있었다. 19화부터 27화까지 누적된 동행의 박자 그대로.
"같은 박자에."
세 사람의 도구가 토르의 검은빛 가닥 위에서 만났다. 막대의 일곱 가닥, 토르 자신의 흰빛과 검은빛, 서연의 어머니 가락. 호수의 옅은 검은빛 자취가 부드럽게 거두어졌다. 그 자리에서 호수의 표면이 잠시 가지런해졌다.
"다섯째 갈래의 둘째 자리가 닫혔어요."
심하가 노를 잠시 멈추고 짧게 짚어 주었다.
"닫은 게 아니라 안아 들이신 거지요. 토르 분께서 50년 동안 자기 어머니의 아들로 자기를 허락하지 않으신 자리를, 처음으로 자기 입에 굴려 보신 거고요. 그 굴림이 어머님 옆으로 가는 한 걸음이에요."
토르의 가슴 안쪽에서 흰빛이 한 가닥 더 또렷이 흘렀다. 50년 동안 옅어져 있던 자기 빛이 자기 자리로 돌아오는 결이었다. 자기 어머니를 자기 입으로 부르는 일이 자기 어머니를 자기 가슴에 다시 모시는 일이라는 사실. 그 사실을 토르가 처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메르가 뱃머리에서 토르를 잠시 돌아보았다. 토르의 얼굴이 27화의 자기 얼굴과 닮은 결로 가지런해져 있었다. 자기 안쪽의 그리움을 처음으로 자기에게 허락한 사람의 얼굴.
"같이 오길 잘했어, 토르."
메르가 짧게 말했다. 그 한 마디가 50년의 거리를 한 박자에 좁히는 결이었다.
"메르도."
토르가 짧게 받았다.
서연이 두 사람 사이에 앉아 부드러운 미소를 한 자락 보탰다. 자기가 비티움의 그릇으로 만들어진 50년이 어머니의 가락 안쪽에서 자라난 50년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두 사람 옆에서 자기를 메르의 자매로 자리잡게 한 자리. 18화 율 선생님의 박물관에서 시작된 서연의 자기 정돈이 28화의 호수 위에서 한 결 더 단단해져 있었다.
심하가 노를 다시 들어 호수 안쪽으로 배를 옮기기 시작했다.
안개가 한 켜 옅어졌다. 사방의 어둠 너머에서 어떤 윤곽이 짚여 나오기 시작했다. 호수의 한가운데. 거기에 옛 도시의 외곽이 가는 자취로 새겨져 있었다. 사람 키 다섯 배쯤 솟은 옛 성벽의 윤곽. 성벽 너머로 작은 지붕들이 한 자락씩 보였다. 50년 전 어머니들께서 들어가신 옛 도시가, 이 호수의 안쪽 깊은 곳에서 자기 자리에 그대로 잠겨 있었다.
"비티움이라는 이름의 옛 도시예요. 100년 전에 사람들이 자기 외면을 한 자리에 모은 첫 모임이 이 도시의 시작이었어요. 그 모임 후에 사람들이 호수의 안쪽으로 도시를 옮겨 두기로 결심했고요. 사람의 바깥 세상에 자기 외면을 두면 사람들이 자기 외면에서 도망 다니느라 한 평생을 보내게 된다는 사실을 옛 사람들이 짚으셨거든요."
"외면을 한 자리에 모은다는 게 무슨 말씀이세요?"
메르가 차분히 물었다.
"사람마다 자기 안에서 외면한 자취가 있어요. 부모를 외면한 자취, 친구를 외면한 자취, 자기 자신을 외면한 자취. 그 자취들이 사람의 안쪽에 머무르면 사람을 평생 짓누르지요. 옛 사람들이 그 자취를 자기 안에서 꺼내, 도시의 한 거점에 모아 두기로 했어요. 그러면 사람이 자기 외면을 마주하고 싶을 때 그 도시에 가서 마주할 수 있고, 마주하고 싶지 않을 때는 그 도시 바깥에서 자기 평생을 살 수 있어요."
"좋은 결심 같은데요?"
토르가 짚어 보았다.
"좋은 결심이지만, 한 가지 잘못이 있었어요. 사람의 외면을 한 자리에 모아 두면, 그 자리가 한 평생을 지나면서 자기 의식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옛 사람들이 짚지 못하셨어요. 도시가 처음에는 사람의 외면을 그냥 받아 두는 자리였지만, 한 평생을 지나면서 자기를 사람의 적으로 인식하게 됐어요. 도시가 자기를 사람의 적으로 인식하면,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사람의 외면을 더 많이 끌어들이려 해요. 그 끌어들임이 50년 전부터 한 행성 위에 깔리기 시작했어요. 어머님들께서 그 흐름을 멈추러 호수 안쪽으로 들어가셨고요."
메르의 마음 안쪽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머니가 50년을 두신 일의 진짜 무게가 28화에서야 다 짚이고 있었다. 어머니가 비티움의 적으로 들어가신 것이 아니었다. 한 도시가 자기 자리를 잃고 사람의 적이 되어 가는 흐름을, 도시 안쪽에서 한 호흡씩 안아 들이는 일을 50년 하고 계셨던 것이었다. 사람의 의식을 가진 도시 한 채를 부드럽게 사람의 자리로 돌리는 의식. 그것이 어머니의 평생 일이었다.
"우리가 닿으면 어머니들께서 그 일에서 풀려나시는 거예요?"
메르가 짧게 물었다.
"두 분이 어머님들의 자식으로 어머님들 옆에 닿으시면, 두 분의 도착 자체가 도시를 부드럽게 사람의 자리로 돌리는 마지막 가락이 됩니다. 어머님들께서 50년 동안 도시를 부드럽게 안아 들이셨고, 그 마지막 자락을 두 분의 도착이 닫아 주는 거지요. 그래서 어머님들이 두 분의 도착을 50년 기다리신 거예요."
배가 옛 도시의 외곽 성벽 가까이로 옮겨 갔다. 성벽의 검은 돌이 사람 손이 한 평생 닦아 온 결의 매끄러움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를 외면받은 자취가 한 평생 자기 모양을 깎아 가면 그 자취가 거꾸로 자기를 다듬어 빛을 낸다는 사실. 외면은 자기를 어둡게 만드는 자리가 아니라, 자기를 가장 단단하게 다듬는 자리이기도 했다.
성벽의 한가운데에 작은 문이 가지런히 열려 있었다. 어머니들께서 50년 전 그 문으로 들어가셨고, 두 자식이 같은 문으로 28화 새벽에 닿고 있었다.
"안내해 드릴 자리는 여기까지예요. 도시 안쪽은 어머님들의 자리고, 두 분의 자리지요. 저는 부두로 돌아가서 다음 손님을 기다릴게요."
심하가 작은 배를 성벽의 문 옆에 단정히 매어 두었다.
"다음 손님이 누구세요?"
메르가 짚어 물었다.
"두 분 자식분들이지요. 두 분이 50년 뒤에 자식을 두시면, 그 자식이 다시 이 부두에 닿아요. 저는 그 자식을 기다릴 거고요."
심하의 답이 부드러웠다. 한 사람이 자기 일을 50년 단위로 받아들이고 살아온 사람의 부드러움이었다. 어머니 한 분의 의식이 자식에게 옮겨 가고, 그 자식의 의식이 다시 손주에게 옮겨 가는 흐름. 그 흐름의 한 자리에 심하가 50년 단위로 자기를 두고 있었다.
세 사람이 작은 배에서 내려 성벽의 문 앞에 섰다. 비익조가 메르의 어깨 위에서 부드럽게 깃을 정돈했다. 다섯째 갈래의 셋째 자리가 성벽 안쪽에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의 별 일곱 개는 변함없이 일행의 머리 위에 머물러 있었다. 다섯째 갈래는 별을 닫지 않는 갈래라는 심하의 풀이가 그대로였다. 두 자식이 자기 어머니들 옆으로 옮겨 가는 자리에서, 별은 닫히지 않고 부드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사람이 자기 외면을 안아 들이는 자리를 별이 지켜보는 일이 50년 동안의 가장 부드러운 흐름이었다.
(29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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