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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속 어딘가에 묻혀 있을, 우주 어딘가에 잠자고 있을, 지구 어딘가에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숨겨진 보물들을 같이 찾아봐요!
지리학자의 본질/지리소설 메르카토르

제23화 — 잠든 종의 소리

by 덕지덕지 2026. 5. 21.

제23화 — 잠든 종의 소리

— 1 —

여울의 모래섬을 떠난 어선이 강을 더 거슬러 올라갔다.

강의 양쪽 풍경이 바뀌고 있었다. 모래섬 부근의 갈대밭이 사라지고, 옅은 회색의 잔디밭이 펼쳐졌다. 잔디 사이사이에 옛 사람의 작은 흔적이 한두 가지씩 남아 있었다. 무너진 돌담의 끝자락, 옛 마을 우물의 윗부분, 깨진 토기 조각. 한때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지만 이제는 발자국이 잦아든 자리였다.

"여기서부터 사라진 도시예요."

다온이 노를 잠시 멈추고 짧게 일러 주었다.

"100년 전 사람들이 자기들의 기억을 다 잃으면서 사라진 곳이고요. 도시의 사람도 사라지고, 건물도 거의 사라졌어요. 종탑만 남았고요."

"왜 종탑만 남았어요?"

메르가 물었다.

"종탑 안쪽에 사람들의 기억을 받은 종이 있어서요. 도시가 사라지면서 사람들의 기억이 다 종 안쪽으로 흘러 들어갔어요. 종이 그 기억의 무게를 받고 잠들었고요. 종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는 종탑이 사라지지 않아요. 종이 깨어나면 종탑도 같이 사라질 수 있고요."

토르가 외투 안주머니에 손을 댔다. 모래 알갱이가 그 안에서 작은 빛으로 떨고 있었다. 그 알갱이가 종을 깨우는 열쇠라고 여울 선생님이 짚어 주었다. 어머니께 50년 만에 받은 첫 짐이, 한 도시의 평생을 깨우는 열쇠이기도 했다. 사람의 자취 하나가 다른 사람들의 자취를 한꺼번에 풀어내는 자리가 있다는 사실. 토르의 두 살 자취가 사라진 도시 사람들의 100년 자취를 풀어낼 자리가 강 안쪽 어딘가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 2 —

강을 더 거슬러 올라가니 멀리 종탑이 보였다. 사람 키의 스무 배쯤 솟은 옛 석조 탑. 옅은 회색 석재가 오랜 비바람을 그대로 받아들인 빛깔이었다. 한 면이 무너져 있었지만, 무너진 자리 사이로 안쪽의 어둠이 깊게 드러나 있었다.

어선이 종탑 옆 자갈밭에 닿았다. 일행이 내렸다. 다온이 어선 옆에 머무르겠다고 짚어 주었다. 종탑 안쪽도 사람의 발만 받아들이는 곳이고, 자기는 어선 옆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세 사람이 종탑 입구로 다가갔다. 입구가 사람 키 정도의 가는 아치였고, 아치 너머로 안쪽의 어둠이 깊게 깔려 있었다. 비익조가 메르의 어깨에서 짧은 떨림으로 깃을 다듬었다. 옅은 경계의 신호였지만, 17·18화의 떨림보다는 잦아든 떨림이었다.

탑 안쪽이 어두웠다. 메르가 외투 안주머니에서 옛 등대의 불씨 주머니를 꺼냈다. 화산 안쪽에서 한 번 쓴 뒤로 처음 다시 꺼내는 자리였다. 영서 선생님이 건네 주신 그 불씨가 탑 안쪽에서 다시 따뜻하게 떨었다.

불빛 아래로 안쪽의 풍경이 드러났다. 종탑의 가장 깊은 곳에 큰 종이 매여 있었다. 청동의 종. 사람 키 두 배쯤 되는 크기. 종의 옆구리에 옛 문자가 새겨져 있었고, 종의 안쪽에 가는 빛이 잠들어 있었다.

종 옆에 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 사람의 모양이었지만, 사람의 몸 안쪽으로 종탑의 벽이 옅게 비쳐 보였다. 사람이 아닌 사람의 흔적이었다.

흔적이 일행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30대로 보이는 여인의 모양이었다. 옅은 회색 옷에 가는 청색 줄이 옷자락 끝마다 들어가 있었다. 머리를 짧게 자른 모양, 두 손을 가슴 앞에 가지런히 모은 자세.

"오셨네요."

흔적이 입을 열었다. 사람의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 안쪽에 옅은 울림이 같이 흘렀다.

"제 이름은 '담연'이에요. 깊고 부드러운 빛이라는 뜻입니다. 100년 전 이 도시의 마지막 종지기였고요. 지금은 종을 지키는 흔적으로 여기 머무르고 있어요."

마지막 종지기 담연이 자기 이름을 건넸다.

세 사람이 자기 이름을 차례로 건넸다. 담연의 시선이 토르 외투의 안주머니 쪽으로 잠시 머물렀다. 토르의 안주머니에서 모래 알갱이가 새벽 빛으로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아본 시선이었다.

"열쇠를 가지고 오셨군요."

"네."

"100년 전 어느 새벽에 어머님 한 분이 이 종탑에 다녀가셨어요. 그 분이 종을 깨우러 오시지 않으셨고요. 다만 종을 깨울 분이 50년 뒤에 오신다고 짚어 주고 가셨어요. 토르 분의 어머님이셨지요."

토르의 마음이 잠시 가라앉았다. 자기 어머니가 사라진 도시의 종탑까지 다녀가셨다는 사실. 50년 전이 아니라 100년 전이라는 사실. 어머니가 시간이 다른 결로 흐르는 곳에서 두 분의 일생을 사신 분이라는 사실이, 5화 한라 선생님이 풀어주신 두 가닥의 시간 풀이로 다시 짚였다. 어머니의 진짜 일생은 메르의 어머니의 그것보다 훨씬 길었다. 두 분이 같은 친구 사이로 50년 전에 함께 다니셨지만, 토르 어머니는 그 50년 외에도 자기 일생을 따로 사신 분이었다.

— 3 —

"종을 어떻게 깨워요?"

토르가 물었다.

"모래 알갱이를 종의 안쪽에 조심스럽게 놓아 주시면 돼요. 알갱이의 빛이 종 안쪽에 잠든 사람들의 기억과 박자에 맞춰 응답할 거예요."

토르가 외투 안주머니에서 알갱이를 꺼냈다. 손바닥 위에서 알갱이가 새벽 빛으로 떨었다. 종 옆으로 다가가 알갱이를 종의 안쪽에 살며시 놓았다.

알갱이가 종 안쪽 깊은 곳에 닿는 순간, 종이 짧은 떨림으로 응답했다. 옅은 울림이 종의 옆구리에서 새어 나왔다. 종 안쪽에 잠들어 있던 사람들의 기억이 알갱이의 빛에 박자를 맞춰 깨어났다.

메르가 외투에서 검은 막대를 꺼냈다. 일곱 가닥의 측량선이 종의 안쪽으로 흘러 들어갔다. 토르가 가슴 위에 손바닥을 댔다. 흰빛과 검은빛이 손바닥 너머로 종에 흘렀다. 서연이 자기 가슴팍에 손바닥을 댔다. 어머니의 가락이 종 안쪽으로 흘러갔다.

"같은 박자에."

세 사람의 말이 종탑 안쪽에서 만났다.

종이 깊게 울렸다. 종소리가 종탑의 사방 벽으로 퍼져 나갔다. 종소리 안쪽에서 사람들의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한 사람의 말, 두 사람의 말, 백 명, 천 명. 사라진 도시의 사람들이 자기 기억을 마지막으로 한 번씩 내어 놓는 소리였다. 어떤 목소리는 자기 자식의 이름을 짚었고, 어떤 목소리는 자기가 사랑한 사람의 얼굴을 짚었고, 어떤 목소리는 자기가 잃어버린 작은 일상의 자락을 짚었다. 사람의 100년이 그렇게 말소리의 짧은 합창으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종소리가 잦아들었다. 종의 안쪽 빛이 조용히 거두어졌다. 모래 알갱이의 빛도 같이 거두어졌다. 종이 다시 잠들었다. 그러나 처음의 잠과 다른 잠이었다. 사람들의 기억이 자기 박자를 다시 찾은 뒤의 깊은 잠이었다.

담연의 흔적이 옅은 미소로 응답했다.

"고맙습니다, 세 분. 100년 동안 사람들의 기억이 자기 자리를 찾고 있었어요. 이제 다 찾았고요."

"담연 선생님께서는요?"

메르가 물었다.

"저도 자기 자리를 찾았어요. 종의 마지막 잠과 같이 가요. 100년 동안 종지기로 머무른 일이 끝났어요."

담연의 흔적이 옅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사람의 모양이 빛 한 줌으로 가벼워졌다. 흩어지면서 마지막에 메르 쪽으로 짧게 손을 흔들었다. 100년의 머무름이 그 손짓 하나로 마무리되었다.

— 4 —

셋째 갈래의 마지막 자리가 닫혔다.

종탑 사방이 가지런해졌다. 무너진 면 사이로 들어오던 새벽 빛이 한 줄 더 짙어졌다. 도시의 사람들이 사라진 곳에서, 사람들의 기억이 자기 자리를 찾은 신호였다.

하늘 어딘가에서 별 하나가 호흡을 멎었다.

검은 점 아홉 개 가운데 세 번째로 떠올랐던 점이 짧은 떨림으로 자기 모양을 잃었다. 가운데가 옅어지고, 가장자리가 풀어지고, 자기를 새겼던 흐름이 거두어졌다. 셋째 갈래가 닫혔다.

행성의 하늘에 별 여덟 개가 남았다.

세 사람이 종탑에서 천천히 나왔다. 다온이 어선 옆에서 짧게 끄덕였다. 일행이 어선에 다시 올라탔다. 강을 거꾸로 내려가 한울 부두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KA가 부두에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토르의 외투 안주머니가 다시 비어 있었다. 모래 알갱이가 종 안쪽으로 옮겨 갔고, 그 자리에 새로운 무게가 깔리지 않았다. 그러나 가슴 가장 깊은 곳에 두 살의 자기가 어머니 옷자락을 놓아주던 그 자취의 자국이 새로 새겨져 있었다. 어머니의 50년 전 부탁이 자기 손으로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의 무게가, 짐이 아닌 사람의 깊이로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메르가 토르 옆에서 짧게 손을 잡았다. 서연이 그 손을 옆에서 받쳐 들었다. 자매와 친구가 자기 옆 사람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함께 머물러 주는 박자가, 셋째 갈래 끝에서 또렷이 자리를 잡았다. 사람이 자기 안쪽 가장 깊은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것은, 사람이 한 평생 사람으로 살아온 뒤에야 마주하는 흔치 않은 일이다.

어선이 강을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강의 풍경이 거꾸로 다시 풀려 갔다. 사라진 도시의 회색 잔디밭이 모래섬의 갈대밭으로, 갈대밭이 한울 부두의 노란 돛으로. 풍경이 풀려 가는 결이 한 갈래가 닫히는 자리에서 사람이 자기 안쪽으로 다시 돌아오는 결과 닮아 있었다.

하늘에 별 여덟 개가 줄로 늘어선 채 일행의 등 위에 머물러 있었다. 세 갈래가 닫혔고, 두 갈래가 남아 있었다. 옅은 노랑의 동방의 갈래. 그리고 검정의 어머니가 계신 자리.

한울 부두가 멀리 안개 너머에서 옅게 떠올랐다. KA가 부두에서 외피를 다듬은 채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현의 시신과 현우 선생님이 외피 안쪽에서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다음 갈래로 옮겨 갈 준비가 끝나가고 있었다.

(24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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