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 남방의 첫 항구
광산 입구를 빠져나오자 광서가 곡괭이를 어깨에 받쳐 든 채로 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밖으로 나서니 빙원의 흰빛이 다시 사방에서 사람의 눈을 받쳐 들었다. 광산 안쪽의 짙은 청색과 빙원의 흰빛이 통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토록 다른 결로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메르는 이제야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사람이 한 통로를 지나면 자기가 본 빛의 색도 같이 바뀐다. 그 단순한 사실이 한 갈래씩 닫으며 옮겨 갈 때마다 메르의 마음에 새겨지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광서 선생님."
메르가 짧게 인사를 건넸다.
"세 분 모두 잘 들어가 주셨어요. 가짜 어머님을 옆에 두고도 자기 박자를 잃지 않으셨고요. 메르 양께서 그 한 마디를 받아들이신 일이 가장 어려웠을 텐데, 그것도 잘 풀어내셨고요."
광서가 짧게 답했다. 광물 옆에서 한 평생을 살아온 사람답게 음운이 굵었지만, 그 굵은 음운 안쪽에 가는 다정함이 한 가닥 흘렀다.
"한 가지 알려 드릴 게 있어요."
광서가 곡괭이를 옆으로 내려놓았다.
"셋째 갈래로 가시는 길이 둘이에요. 빙원 위로 다시 올라가셔서 옛 길을 돌아가시는 길이 한 갈래, 광산의 안쪽 통로를 따라 행성의 반대쪽으로 곧장 가시는 길이 다른 갈래. 둘째 길이 빠르지만, 가시는 동안 시간의 박자가 다시 흐트러져요."
"단오 선생님께서 새겨 주신 시계 가락 덕분에, 흐트러져도 자기 박자를 찾을 수 있겠지요?"
메르가 물었다.
"맞아요. 그래서 둘째 길을 권해 드릴게요. 빠르고, 두 분의 마음 안쪽에 단오 선생님의 가락이 자리잡아 있으니 자기 박자를 잃지 않으실 거예요."
광서가 광산 통로 안쪽 깊은 곳을 곡괭이로 가리켰다.
"그 통로의 끝이 남방의 항구로 이어져요. 항구 이름이 '한울'입니다. 가시면 항구 부두에 한 사람이 두 분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누구신가요?"
토르가 물었다.
"한울의 뱃사공 '다온'이에요. 50년 전 어머님들께서 두 분 다 그 뱃사공의 어머니 손에서 차 한 잔을 받으셨다고 들었어요. 다온이 그 어머님의 따님이고요. 솔, 단, 누리, 율, 그리고 다온. 어머님들 부탁이 한 세대를 넘어 다음 세대로 옮겨 간 자리가 점점 늘어가고 있어요."
네 사람과 KA가 광산 안쪽 통로로 다시 들어갔다. 광서가 입구에서 곡괭이를 다시 어깨에 받쳐 든 채 작게 손을 흔들었다. 50년이라는 시간이 한 사람을 한 자리에 그렇게 오래 머물러 있게 하면서도 그 사람의 음운에서 다정함을 새어 나오게 한다는 사실을, 메르는 광서의 마지막 손짓에서 또렷이 받아들였다. 사람의 가장 깊은 친절은 자기가 한 평생 같은 자리를 지키면서도 자기를 만나러 오는 사람을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데에서 새어 나온다.
통로의 안쪽은 광산보다 한 결 어두웠다. 사방의 돌이 짙은 청색에서 점차 검은빛으로 옮겨 갔다. 광물의 호흡 소리가 잦아들면서, 그 자리에 다른 종류의 소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멀리서 흘러오는 가는 박자의 음운 같은 소리.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고, 광물의 호흡도 아니었다. 단오 선생님이 새겨 주신 시계 가락이 두 사람 안쪽에서 응답하는 소리였다. 시간이 다시 흐트러지기 시작한 자리였다.
메르가 가슴 위에 손바닥을 댔다. 단오 선생님의 시계 가락이 손바닥 안쪽에서 한 박자에 맞춰 가지런히 흐르고 있었다. 시간이 흐트러져도 자기 안쪽의 가락이 자기 박자를 지켜 주고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을 메르는 그제야 또렷이 깨달았다. 사람이 자기 안쪽에 자기를 받쳐 주는 가락 한 가닥을 미리 새겨 두었을 때, 그 가닥이 바깥의 어떤 흐트러짐 안에서도 자기를 가지런히 지켜 준다.
서연이 옆에서 가는 음운을 보탰다.
"저도 그 가락을 받았네요. 단오 선생님께서 두 분께만 새겨 주신 줄 알았는데, 제 안쪽에도 같은 가락이 흘러요."
"단오 선생님께서 미리 짚어 두셨던 모양이에요."
메르가 답했다.
"우리 셋이 같은 박자로 흐를 수 있도록요. 저를 풀어내신 율 선생님의 자리에서, 광물의 새벽 옆에서, 박물관과 광산이 다 같은 어머니 부탁 안쪽에 있었던 것처럼요."
서연의 음운에서 사람의 떨림이 새로 흐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비티움의 그릇이 50년 동안 키워 낸 사람의 가닥이, 어머니의 가락 안쪽에서 또렷이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서연이 점점 사람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그 자라남이 메르 옆에서 사람과 사람이 자매로 자라나는 모양과 닮아 있었다.
토르가 자기 가슴팍 두 빛을 손바닥으로 짚으며 옆에서 음운을 보탰다.
"현우 분께서도 KA 안쪽에서 같은 박자로 호흡하고 계셔."
"그러면 우리 다섯이 같이 가는 거네요."
서연이 작게 웃었다.
"메르, 토르, 서연, 현우 분, 그리고 KA. 다섯이서 한 박자에."
"비익조까지 여섯이지."
메르가 어깨 위 비익조를 보며 답했다. 비익조가 가는 부리를 한 번 다물었다 폈다. 자기를 빠뜨리지 않은 사실을 받아들이는 응답이었다.
통로의 끝이 가까워지면서 빛이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다. 흰빛도 아니고 짙은 청색도 아닌, 옅은 노을 같은 붉은빛이었다. 셋째 갈래의 빛깔이었다. 멀리 통로의 끝에서 그 빛이 한 가닥씩 안쪽으로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통로 끝에 다다르자 풍경이 트였다.
남방의 항구였다. 한울. 항구의 풍경이 부동항이나 페트로나스와 또 달랐다. 부동항이 차가운 바다 위의 어부 마을이었다면, 한울은 따뜻한 바다 위의 큰 시장이었다. 부두를 따라 가는 천막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천막마다 사람들이 한 자리씩 앉아 있었다. 옷이 옅은 흰색에 가까운 빛깔이었고, 머리에 가는 면포를 하나씩 두른 사람들이었다. 옛 한국 옷보다는 옛 베트남이나 옛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결과 닮은 옷이었다.
바닷물의 색이 옅은 청색이 아니라 옅은 붉은빛에 가까웠다. 노을이 바닷물 안쪽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었다. 사람들의 어선이 그 붉은 바닷물 위에서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오고 나가고 있었다. 어선의 돛이 옅은 노란색이었다. 햇빛이 돛에 닿으면 노란 천이 옅은 황금빛으로 한 번씩 떨었다.
부두 끝에 작은 나무 부둣가 자리가 있었고, 그 자리에 한 사람이 앉아 노를 다듬고 있었다. 40대로 보이는 여인이었다. 검은 머리를 하나로 길게 묶고, 옅은 흰 옷을 어깨 위에 두꺼운 가는 줄로 묶었다. 양손이 거칠었다. 한 평생을 노 옆에서 살아온 사람의 손이었다.
메르 일행이 부둣가 자리 옆에 멎었다.
여인이 노를 옆에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옅은 미소가 입가에 한 줄 떠올랐다.
"오셨네요."
"기다리고 계셨어요?"
메르가 물었다.
"세 시간쯤요. 광서 선생님께서 한 가락 보내 주신 직후부터요. 제 이름은 '다온'이라고 해요. 한울 부두의 뱃사공입니다."
한울 부두의 뱃사공 다온이 자기 이름을 건넸다.
"메르예요. 옆에 토르, 서연이고요."
"세 분 다 환영합니다. 제 어머니 손에서 두 분 어머님들께서 차 한 잔씩 받으신 자리가 이 부둣가에서 가깝거든요. 50년 전 일이지만, 어머니가 그날 일을 평생 가슴에 두고 사셨어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저에게 그 부탁을 넘겨 주셨고요."
다온의 음운에서 사람의 한 평생이 다음 세대로 옮겨 가는 무게가 새어 나왔다. 50년 전 한 어머니가 두 어머니에게 차 한 잔씩 따라 드린 그 자리가, 한 세대를 넘어 그 어머니의 따님에게로 옮겨 가 있었다. 사람의 다정한 한 자리가 한 세대를 살아남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고, 두 세대를 살아남는 일은 그보다 더 흔치 않다. 어머니들이 50년 전 한울 부두에서 받은 차 한 잔이 그 흔치 않은 자리가 되어 있었다.
다온이 부둣가 옆 작은 좌판에서 찻주전자를 꺼냈다. 옅은 청록의 차였다. 부동항 솔의 자작나무 술과도 다르고, 영서 등대의 검은 차와도 다르고, 율 박물관의 회색 차와도 다른 결의 차였다. 첫 모금이 따뜻하지 않았다. 옅게 시원했다. 남방의 차가 한 평생을 더운 햇빛 아래에서 우러난다는 사실. 차의 가락이 차가 자란 자리의 햇빛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
"셋째 갈래의 풀이를 시작할게요."
다온이 입을 열었다.
"첫 갈래가 본체에 관한 갈래였고요. 둘째 갈래가 시간에 관한 갈래였고요. 셋째 갈래는 다른 결이에요. 사람의 기억에 관한 갈래입니다."
"기억이요?"
토르가 물었다.
"네. 비티움이 사람의 본체를 끊어 놓고, 사람의 시간을 흩어 놓고, 그 다음에 사람의 기억을 가져가요. 사람이 자기 기억을 잃기 시작하면, 자기가 누구인지를 잊고, 자기를 사랑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잊고, 자기가 사랑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잊어요. 셋째 갈래에서 두 분이 닫으셔야 할 자리들이 그 기억의 자리들이에요."
메르는 마음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비티움의 작동 방식이 갈래마다 한 결 더 깊어지고 있었다. 본체에서 시간으로, 시간에서 기억으로. 다섯째 갈래에 다다랐을 때 어머니 옆에서 자기가 무엇을 잃고 있을지를 예감하는 자리였다.
"셋째 갈래에 자리가 몇 개인가요?"
메르가 물었다.
"셋입니다. 첫째가 이 한울의 옛 시장. 사람들이 기억을 사고파는 자리예요. 둘째가 남방 강의 어느 모래섬. 한 사람의 기억이 한 알의 모래로 자라난 자리고요. 셋째가 셋째 갈래의 마지막 자리, 사라진 도시의 옛 종탑이에요."
"사라진 도시요?"
서연이 물었다.
"네. 100년 전에 사람들이 한 자리에서 자기들의 기억을 다 잃은 결로 자기들도 같이 사라진 도시가 있어요. 도시가 사라졌지만, 도시의 종탑은 그 자리에 남아 있어요. 사람들의 기억을 받은 종이 그 종탑 안쪽에 잠들어 있고요. 그 종을 깨우는 일이 셋째 갈래의 마지막 풀이입니다."
다온이 차주전자에서 차 한 잔을 다시 따랐다. 메르의 잔이 다시 채워졌다.
"한 가지 미리 알려 드릴게요. 셋째 갈래에서 비티움이 두 분께 보내는 자가 사람의 모양이 아니에요."
"그러면요?"
"두 분 자신의 기억의 모양이에요. 두 분이 잃어버린 기억 한 자락이 사람의 모양으로 두 분 앞에 다시 떠올라요. 그 기억을 받아들이고 거두어 가시는 일이 어렵습니다. 자기 기억이 자기를 보면서 옆에 머물러 달라고 권유할 때, 사람이 그것을 거절하기가 평생 가장 어려운 일이거든요."
메르는 차분히 자신을 되짚어 보았다. 자기가 잃어버린 기억 한 자락이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다. 어머니의 마지막 새벽에 들었던 콧노래의 가사.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 12년 동안 마음 가장 깊은 자리에서 미루고 있던 작은 기억들. 그 중 한 자락이 사람의 모양으로 자기 앞에 떠오를 것이었다.
"내일 새벽에 한울의 옛 시장으로 가시지요. 새벽 안개 안쪽에서만 시장 입구가 보입니다. 오늘 밤은 제 집에서 쉬셔도 되고요."
다온이 짧게 끄덕였다. 손바닥에 묻은 노의 가는 가루를 옷자락으로 한 번 닦았다.
한울 부두 너머로 햇빛이 한 호흡 더 가라앉아 있었다. 옅은 노을이 바닷물 안쪽으로 길게 가라앉으면서, 어선의 노란 돛 위에 옅은 황금빛이 더 깊이 새겨졌다. 사람들의 음운 소리가 부두를 따라 가는 가닥으로 깔려 있었다. 한울이 한 평생을 그렇게 따뜻한 노을 안에서 흘러가는 자리라는 사실을, 메르는 첫 번째 인사 안쪽에서 또렷이 받아들였다.
하늘에 별 아홉 개가 줄로 늘어선 채 메르 일행의 등 위에 머물러 있었다. 둘째 갈래가 닫혔고, 셋째 갈래의 첫 자리가 내일 새벽에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메르가 외투 안주머니에 손을 댔다. 어머니 사진, 검은 막대, 한라의 종이, 비티움 좌표 지도, 잃어버린 산해경 첫 페이지, 자줏빛 통행증, 회색 통행증, 페트로나스 비밀 지도, 옛 등대의 불씨, 단오 선생님의 가죽 주머니, 율 선생님의 광산 지도. 안주머니의 짐 옆에 옆 사람 세 명이 있었다. 짐 한 자락이 늘어날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지는 결이 아니라, 옆 사람 한 명이 늘어나면서 짐을 나누어 들고 가는 결이었다.
(21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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