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 기억을 사고파는 시장
새벽이 한울의 부두 위로 내려앉아 있었다.
노을은 밤사이에 자기 자리를 새벽 빛에게 내어 주고 가라앉았고, 그 가라앉음 위에 안개가 가는 가닥으로 깔렸다. 부두 옆 어선들의 노란 돛이 안개 안에서 흐릿해졌다. 사람의 음운 소리도 잦아들어 있었다. 새벽이라는 시간이 한 도시의 모든 가락을 한 번씩 가지런히 다듬어 두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메르는 다온의 집 마루에서 바깥을 보며 처음으로 깨달았다.
다온의 집은 부둣가에서 다섯 걸음 거리였다. 옛 한국의 작은 한옥과 닮은 모양의 집이었지만, 처마 끝이 더 길고, 마루 위에 가는 대나무 발이 한 자락 늘어져 있었다. 더운 햇빛이 들이치는 날에는 그 발을 내려 마루의 그늘을 지킨다고 어제 다온이 일러 주었다.
메르는 마루 위에 앉아 차 한 잔을 마시고 있었다. 토르와 서연은 마루 안쪽에서 짐을 다시 꾸리고 있었다. KA는 부둣가 옆에 자기 외피를 다시 다듬은 채로 새벽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온이 마루 옆으로 와서 짧게 음운을 보탰다.
"시장 입구가 부두에서 한 시간 거리예요. 안개 안쪽에서만 입구가 보이니까, 새벽이 더 깊어지기 전에 가시는 게 좋아요."
"같이 가 주실 수 있어요?"
메르가 물었다.
"입구까지만요. 시장 안쪽에는 두 분과 한 분만 들어가실 수 있어요. 안내해 드릴 분이 안쪽에 따로 계시고요."
"누구신가요?"
"'소율' 선생님이에요. 웃음의 가락이라는 뜻입니다. 한울 시장의 옛 기억상인이세요."
다온의 음운에 가는 미소가 한 자락 흘렀다. 소율이라는 이름을 자기 입에 굴리면서 다온의 표정이 옅게 풀어졌다. 사람의 한 이름이 다른 사람의 음운 안쪽에서 그렇게 자기 빛을 새어 내는 일은, 두 사람 사이에 평생의 어떤 다정한 자리가 있다는 신호였다.
"다온 선생님과 가까운 사이세요?"
서연이 마루 안쪽에서 짐을 묶으며 물었다.
"제 어머니의 옛 친구 분이세요.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옆에 있어 주셨고요. 어머니께서 저에게 부탁을 넘기실 때, 소율 선생님께도 같은 부탁을 같이 새겨 두셨어요."
다온이 마루 위 차주전자에서 한 잔을 더 따라 메르의 잔을 채워 주었다.
다온이 길을 안내했다. 부두를 빠져나와 옛 한국의 골목과 닮은 좁은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골목의 양옆에 옛 한자가 새겨진 작은 간판들이 가는 가닥으로 늘어서 있었다. 차 가게, 노 만드는 가게, 새벽에만 여는 떡집. 사람들이 골목 안쪽 작은 의자 옆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한울의 새벽이 사람의 가장 부드러운 시간이라는 사실을, 골목의 풍경이 한 줄로 일러 주었다.
골목의 끝에서 길이 갈라지는 자리에 안개가 가장 두껍게 깔려 있었다. 다온이 멎었다.
"여기예요. 안개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시장 입구가 보입니다."
"고맙습니다, 다온 선생님."
"세 분 모두 잘 다녀오세요."
다온이 짧게 끄덕이고 골목 안쪽으로 돌아섰다.
메르, 토르, 서연이 안개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비익조가 메르의 어깨 위에서 가는 떨림으로 깃을 다듬었다. 안개의 안쪽에서 풍경이 한 번 더 흐려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안개가 자기 가락을 안쪽으로 거두면서, 시장의 입구가 또렷이 떠올랐다.
옛 한국의 큰 시장과 닮은 풍경이었다. 그러나 다른 곳이 있었다. 좌판의 위에 사람의 물건이 놓여 있지 않았다. 좌판마다 가는 유리병이 한두 개씩 놓여 있었고, 유리병 안쪽에 옅은 빛 한 자락씩이 갇혀 있었다. 사람의 기억이었다. 한 사람의 한 기억이 유리병 안에 빛 한 자락으로 담겨 있는 자리였다.
좌판 옆에 사람들이 한두 명씩 앉아 있었다. 자기 기억을 팔러 온 사람, 다른 사람의 기억을 사러 온 사람. 사고파는 음운이 가는 가닥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지만, 옛 시장의 떠들썩한 가락이 아니라 새벽의 가지런한 가락이었다. 사람이 자기 기억 한 자락을 팔아 다른 사람의 기억 한 자락을 받는 일. 그 거래가 가장 부드러운 새벽 시간에 오갈 수밖에 없는 까닭은, 사람이 자기 기억을 가장 정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 새벽이기 때문이었다.
시장의 한가운데에 큰 좌판이 있었다. 좌판 옆에 50대로 보이는 여인이 앉아 있었다. 옅은 흰 옷에 자줏빛 자수가 옷자락 끝마다 새겨져 있었고, 머리를 길게 하나로 묶었다. 양손에 가는 가죽 장갑을 끼고, 좌판 위 유리병 한 개를 손바닥 사이에 두고 있었다.
메르 일행이 좌판 옆에 멎었다.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입가에 옅은 미소가 한 줄 떠올랐다.
"오셨네요. 다온이 한 가락 보냈고요. 어제부터 기다리고 있었어요."
"'소율' 선생님이세요?"
메르가 물었다.
"네. 소율이라고 해요. 한울 시장의 옛 기억상인이에요. 어머님들 부탁을 받은 자리고요."
한울 시장의 기억상인 소율이 자기 이름을 건넸다.
세 사람이 자기 이름을 차례로 건넸다. 소율의 시선이 잠시 서연 쪽에 머물렀다. 서연의 가락 안쪽에 어머니 가락이 흐른다는 사실을 알아보는 시선이었다. 소율이 옅은 미소로 응답했다. 비티움의 옛 그릇이 사람으로 자라난 자매를 처음 만난 사람의 응답이었다.
"셋째 갈래의 첫 자리가 이 시장 안쪽 가장 깊은 곳에 있어요. 거기까지 안내해 드릴게요. 그 자리에서 두 분 어머님 부탁의 한 자락을 풀어 드리고요."
소율이 좌판 위 유리병을 옷자락 안쪽으로 거두었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장의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좌판이 줄어들었고, 좌판 옆에 앉은 사람의 수도 줄어들었다. 시장의 가장 안쪽에서는 좌판이 하나도 없었다. 가는 등불 하나가 한 자리에 매여 있을 뿐이었다.
등불 옆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메르의 호흡이 멎었다.
열두 살의 자기였다.
머리를 한 줄로 짧게 묶고, 옅은 회색 교복을 입고, 손에 작은 책가방을 들고 있는 모양. 메르가 한 평생 거울 앞에서 봐 온 자기의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떠나신 날 새벽에 학교로 가던 자기.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집에 어머니가 없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자기. 메르의 12년이 그 한 순간에서 시작된 자기였다.
열두 살의 메르가 어른 메르를 보며 입을 열었다.
"엄마가 안 와."
어른 메르의 호흡이 다시 멎었다.
"엄마가 안 와. 집에 왔는데 엄마가 없어. 식탁 위에 메모 한 장이 있어. 출장 간다고 적혀 있어. 엄마가 언제 오는지는 안 적혀 있어."
열두 살의 메르의 음운에서 옅은 떨림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어머니의 부재를 처음 알게 된 자식의 떨림. 그 떨림이 어른 메르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12년 동안 잠들어 있던 떨림이었다.
"가지 마, 언니. 옆에 있어 줘. 엄마가 안 오는데, 언니도 가면 나 혼자야."
어른 메르의 눈가가 젖었다. 자기가 자기를 언니라 부르는 일. 자기의 한 자락을 다른 자기에게 호명하는 일. 사람이 자기를 가장 외면하기 어려운 자리가 거기였다.
토르가 메르의 왼쪽 손을 잡았다. 서연이 메르의 오른쪽 손을 잡았다. 19화 광산에서 두 사람이 메르의 양손을 잡았던 그 자세 그대로였다. 같은 박자에, 같은 무게로.
소율이 한 걸음 옆에서 옅은 음운을 보탰다.
"저 아이는 가짜예요, 메르. 진짜 열두 살의 메르 양은 그 날 집에 돌아와서 식탁 위 메모를 봤지만, 옆에 있어 달라고 자기 자신에게 한 번도 부탁하지 않았어요. 그 자식은 자기 혼자 그 날 밤을 견뎌 냈고요. 자기를 옆에 있어 달라고 부탁하는 저 아이는 비티움이 빚은 가짜고요."
소율의 말이 어른 메르의 안쪽에서 한 가닥의 진실로 자리를 잡았다. 열두 살의 자기는 그날 밤 혼자 견뎌 냈다. 옆에 있어 달라고 누구에게도 부탁하지 않았다. 그 견딤이 12년을 살게 한 자기의 첫 자락이었다. 자기를 옆에 두라고 권유하는 이 열두 살은 비티움이 자기 견딤을 빌려 빚은 가짜였다.
어른 메르가 작게 입을 열었다.
"열두 살의 나야."
가짜 열두 살의 메르가 어른 메르를 봤다.
"나는 그 날 너를 외면하지 않았어. 너는 그 날 밤을 혼자 견뎌 냈고. 너를 옆에 두라고 누구에게도 부탁하지 않았어. 그 견딤이 너를 12년 동안 살게 한 자리야."
가짜의 입가가 한 호흡 멎었다.
"엄마가 다섯째 갈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셔. 나는 너의 견딤을 빌려서 거기까지 가야 해. 너는 가짜고, 너 안쪽에 진짜 열두 살의 한 자락이 있어. 그 자락은 받아 가지만, 너의 권유는 거절할게."
어른 메르가 외투 안주머니에서 검은 막대를 꺼냈다. 토르가 가슴 위에 손바닥을 댔다. 서연이 자기 가슴팍에 한 손바닥을 댔다.
"같은 박자에."
세 사람의 음운이 한 자리에서 만났다.
막대의 일곱 가닥, 토르의 두 빛, 서연의 어머니 가락 한 가닥이 가짜 열두 살의 모양 한가운데에서 한 박자에 모였다. 가짜의 모양이 가는 가닥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흩어지면서 열두 살의 메르가 마지막에 옅은 미소를 어른 메르 쪽으로 보냈다. 가짜였지만, 그 미소는 열두 살의 자기가 어른이 된 자기를 알아본 미소이기도 했다. 12년 만에 자기가 자기를 마주 본 자리에서 새어 나온 미소.
가짜가 안개로 흩어졌다.
등불의 빛이 한 호흡 가지런해졌다. 시장 안쪽의 가장 깊은 자리가 닫혔다. 셋째 갈래의 첫 자리가 닫혔다.
소율이 옆에서 짧게 끄덕였다.
"메르 양이 자기 견딤을 다시 알아보셨어요. 그것이 첫 자리를 닫는 가장 깊은 풀이예요."
"고맙습니다, 소율 선생님."
"한 가지 더 알려 드릴게요. 셋째 갈래의 둘째 자리가 남방 강의 모래섬에 있어요. 다온이 부두에서 어선으로 거기까지 안내해 드릴 거고요. 모래섬에서는 토르 분이 자기 기억의 모양을 만나시게 됩니다."
토르의 가슴이 짧게 응답했다. 메르가 열두 살의 자기를 마주한 자리에서 자기가 옆에서 받쳐 들었듯이, 다음 자리에서는 자기가 자기 기억의 모양을 마주하게 된다는 사실. 두 사람이 갈래마다 한 번씩 자기 안쪽을 들여다보는 자리에 다다르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토르가 짧게 인사를 건넸다.
소율이 시장의 입구 쪽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새벽이 한층 깊어져 있었다. 안개가 조금씩 잦아들면서 시장의 좌판들이 더 또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다시 거두어질 풍경이었다. 새벽이 끝나면 시장의 입구도 다음 새벽까지 닫힌다고 소율이 일러 주었다.
하늘에 별 아홉 개가 줄로 늘어선 채 메르 일행의 등 위에 머물러 있었다. 셋째 갈래의 첫 자리가 닫혔고, 두 자리가 남아 있었다. 별의 무게가 한 호흡 더 가까이 깔리고 있었다.
메르의 외투 안주머니에 짐이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새 짐은 없었다. 다만 마음 가장 깊은 자리에 열두 살의 자기 미소가 한 자락 더 새겨져 있었다. 사람이 자기 안쪽 가장 깊은 곳에서 자기 자신을 다시 알아보는 일이, 짐이 아니라 한 사람의 깊이가 되어 머무르는 자리였다.
시장 입구의 안개 너머로 한울 부두의 새벽이 옅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다온이 부두에서 어선의 노를 다듬은 채 일행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22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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