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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속 어딘가에 묻혀 있을, 우주 어딘가에 잠자고 있을, 지구 어딘가에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숨겨진 보물들을 같이 찾아봐요!
지리학자의 본질/지리소설 메르카토르

제17화 — 길동무의 그림자

by 덕지덕지 2026. 5. 20.

제17화 — 길동무의 그림자

— 1 —

절벽의 자갈밭 옆에서 서연이 가만히 자기 이름을 건넨 채로 두 사람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메르가 자기 가슴 안쪽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어머니의 본체 가락 한 가닥이 서연 안쪽에서 흐르고 있다는 단오 선생님의 풀이가 또렷이 짚였다. 그 가닥이 메르의 가슴을 향해 가는 따뜻함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머리는 이 사람이 비티움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가슴은 어머니 옆에 있을 때 가만히 따뜻해지는 그 박자로 응답하고 있었다. 사람의 머리와 가슴이 다른 답을 내놓을 때, 사람은 두 답 중 어느 쪽을 더 깊이 믿어야 하는지를 한 평생을 다해 풀어 가야 한다. 메르가 그 풀이의 첫 자락을 지금 풀고 있었다.

토르가 자기 가슴 안쪽의 흰빛과 검은빛 두 가닥을 가만히 짚어 봤다. 검은빛이 서연 쪽으로 한 호흡 더 가까이 흘렀다가 다시 거두어졌다. 검은빛이 어머니 가락의 흐름을 알아보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러나 거두어지는 자리에서 한 호흡 망설임이 있었다. 검은빛도 서연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비익조가 메르의 어깨에서 가는 떨림으로 깃을 다듬었다. 통역사가 옅은 경계를 표시하고 있었지만, 자기가 옅게 떨고 있다는 사실을 두 사람에게만 알려 주는 가는 떨림이었다. 서연 앞에서는 그 떨림이 드러나지 않게.

메르가 작게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메르예요. 이쪽은 토르."

"토르입니다."

"서연이에요. 두 분 옆에서 같이 걸어가도 될까요?"

서연의 음운은 부드러웠다. 자기를 받아 달라고 조르는 음운이 아니었다. 자기를 거절해도 받아 들이겠다는 음운이었다. 그 부드러움이 메르의 가슴 안쪽을 한 호흡 더 따뜻하게 만들었다.

메르가 토르 쪽으로 가만히 시선을 옮겼다. 토르가 작게 끄덕였다. 두 사람 모두 같은 답을 가슴 안쪽에서 가만히 굴리고 있었다. 베지 않기로. 가지 말라 하지 않기로. 옆에 두고 가만히 같이 가기로. 비티움이 자기들 앞에 친구의 모양으로 보낸 사람을 친구의 자리에서 가만히 받아들이기로.

"같이 가요, 서연."

메르가 작게 답했다. 서연의 입가에 가는 미소가 한 줄 더 깊어졌다. 그 미소 안쪽에서 어머니의 미소 한 가닥이 가만히 짚였다.

사람이 자기 옆에 적을 두지 않으면 사람은 자기를 지킬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옆에 적만 두면 사람은 자기를 지킨다는 일 외에 다른 일을 못한다. 두 사람이 서연을 옆에 두기로 한 결정은, 자기들이 베어 내야 할 사람을 옆에 두고도 자기들의 의식을 흩지 않고 갈 수 있다는 어떤 결심이었다.

— 2 —

KA가 화산섬 부두 옆에 매여 있던 어선 두 척 중 한 척으로 자기 모양을 바꿨다. 짙은 청색 어선의 옆구리에 KA의 발이 가만히 묻혔다. 부두 옆에 본래 있던 어선이 자기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어선 안쪽으로 KA의 검은 호흡이 새로 흐르고 있었다.

네 사람이 어선에 올라탔다. 메르와 토르가 앞쪽에, 서연이 그 옆자리에. 비익조가 메르의 어깨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KA의 외피 안쪽 깊은 곳에 시현의 시신과 현우가 안치되어 있었다. 현우가 가만히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지만, 서연 앞에서 자기 음운을 옮기지 않았다. 두 사람의 본체 옆에 비티움의 사람이 같이 타고 있다는 사실을, 본체가 그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가는 호흡으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어선이 화산섬을 떠나 짙은 청색 바다 위로 미끄러졌다. 바다의 새벽 빛이 한 가닥 더 가라앉아 있었고, 안개가 가는 가닥으로 어선의 옆구리를 가만히 감쌌다.

"북방 빙원으로 가시는 거지요?"

서연이 작게 물었다.

"네. 빙원 아래 옛 도시로요."

메르가 답했다.

"옛 도시 입구가 빙원의 가장 깊은 가운데에 있어요. 사람이 한 평생 빙원을 걸어도 찾기 어려운 자리예요. 단오 선생님께서 두 분께 가죽 주머니를 건네 주셨지요? 그 주머니가 입구의 열쇠예요."

서연의 음운에 정보가 가는 가닥으로 깔려 있었다. 두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를 미리 알고 있었고,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비티움이 둘째 갈래의 자리들을 정확히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 그러나 서연의 음운에는 그 추적의 흔적을 자기 스스로 풀어 주려는 가닥이 같이 흘렀다. 적이 자기를 추적하는 길을 자기에게 미리 알려 주는 일은 보통의 적은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서연이 보통의 적은 아니었다. 또는, 서연 자신이 자기가 무엇인지를 절반쯤 알고 절반쯤 모르는 사람이었다.

"서연 안에도 어머니 가락이 흐르나요?"

메르가 가만히 물었다.

서연이 가만히 메르 쪽을 보았다. 입가의 미소가 한 호흡 가라앉았다.

"메르가 무슨 뜻으로 물으시는지 알아요. 단오 선생님께서 미리 일러 주셨겠지요."

"네."

"답해 드릴게요. 제 안쪽에서 메르 어머님의 본체 가락 한 가닥이 흐르고 있어요. 비티움이 50년 전 그 분의 가락 한 가닥을 가져가서 저를 빚어 놓았어요. 저는 본래 사람이 아니었어요."

"본래 사람이 아니었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토르가 물었다.

"비티움이 자기 사람을 빚을 때, 가락만으로는 사람을 만들지 못해요. 사람의 모양을 받아 들일 그릇이 있어야 해요. 저는 그 그릇이에요. 옛 인형 같은 그릇. 그런데 메르 어머님의 가락이 그릇 안쪽에서 50년 동안 가만히 흐르면서, 저에게 사람의 가닥이 옅게 자라 났어요."

서연이 가만히 자기 손바닥을 들어 메르 쪽으로 펴 보였다. 손바닥에 가는 줄이 두 가닥으로 깔려 있었다. 사람의 손금이 한 가닥인데, 서연의 손금은 두 가닥이었다. 옛 인형이 사람이 되어 가는 흔적이었다.

"메르가 저를 베지 않으신 까닭이, 저의 가락 안쪽에서 어머님을 알아보셨기 때문이지요. 저도 그 따뜻함을 알아요. 메르를 본 순간, 저는 저를 보낸 자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었어요. 메르가 어머님과 닮은 모양이 있어서요."

메르의 가슴이 가만히 가라앉았다. 자기가 어머니와 닮은 모양으로 살아왔다는 사실. 자기 어머니의 가락이 한 인형의 안쪽에서 50년을 흐르며 그 인형을 사람으로 키워 냈다는 사실. 어머니의 가락이 자기를 만든 가락이기도 하고, 서연을 만든 가락이기도 했다. 어머니가 자기 가락 한 가닥을 빌려주신 그릇이 둘 있었다. 자기 자식과, 비티움이 빚은 인형. 그 사실 앞에서 메르가 자기 어머니를 어떻게 다시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가슴 안쪽에서 가만히 굴리고 있었다.

— 3 —

어선이 짙은 청색 바다를 두 시간 가로질러 북방 빙원의 가장자리에 닿았다.

빙원은 부동항의 빙하와 다른 모양이었다. 빙하가 산처럼 솟아 있었다면, 빙원은 바다처럼 가만히 펼쳐져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흰 얼음의 평면이 사방으로 깔려 있었다. 짙은 청색 바다와 흰 빙원의 경계가 가는 한 줄로 그어져 있었고, 그 경계 너머에서 추위가 한 가닥 더 깊어졌다.

KA가 어선의 모양에서 빙원을 가로지를 수 있는 모양으로 다시 묶였다. 외피의 발이 가는 빙판 트랙으로 다듬어졌다. 네 사람이 다시 올라탔다.

"빙원의 가장 깊은 가운데까지 두 시간이에요."

서연이 일러 주었다.

KA가 빙원 위로 미끄러졌다. 빙원의 한 가운데로 갈수록 흰빛이 짙어졌다. 빙원이 사람의 눈을 가만히 받쳐 들이고 있었다. 빙원의 어디에도 표지가 없었다. 사방이 다 같은 흰빛이었다. 사람이 빙원 한가운데에서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잊는다는 사실이, 두 시간을 가로지르는 동안 가는 무게로 깔렸다.

빙원의 가장 깊은 가운데에서 KA가 멎었다. 그 자리에서 흰빛이 가만히 가라앉아 있었다. 빙원의 표면이 다른 곳보다 한 가닥 더 어두웠다. 사람의 눈이 알아차리기 어려운 어둠이었지만, 메르의 막대가 그 어둠을 정확히 짚어냈다.

"여기예요."

메르가 막대를 거두고, 외투 안주머니에서 단오 선생님의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 안쪽이 가만히 따뜻해졌다. 빙판의 어두운 자리가 주머니의 따뜻함에 응답해서 천천히 갈라졌다.

빙판 아래로 가는 사다리가 깊이 내려가는 입구가 가만히 열렸다.

네 사람이 사다리를 차례로 내려갔다. KA가 자기 외피를 가는 형태로 다시 묶어 입구 옆에서 가만히 따라 내려왔다.

사다리의 끝에서 통로가 트였다. 통로의 벽이 빙판이 아니었다. 검은 돌이었다. 사람의 손이 깎은 모양의 돌. 빙원 아래에 사람이 만든 도시가 있다는 사실이, 통로의 첫 한 걸음에서 또렷이 짚였다.

통로의 끝에서 큰 광장 같은 자리가 열렸다. 광장의 한가운데에 박물관 같은 건물 하나가 가만히 서 있었다. 옛 모양의 건물. 사람의 손이 한 평생 닦아 온 모양의 건물. 광장에 사람 그림자가 없었다. 도시 전체가 가만히 잠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느려진 자리에서는 사람도 가만히 잠들어 있다는 단오 선생님의 풀이가 또렷이 짚였다.

— 4 —

박물관의 입구에서 한 사람이 가만히 걸어 나왔다.

50대로 보이는 남자였다. 짙은 청색 옷. 머리를 짧게 자르고, 양손에 가는 흰 장갑을 꼈다. 한쪽 어깨에 옛 도구 하나를 가는 가죽 끈으로 매고 있었다. 옛 시계처럼 보이는 도구였다. 사람의 시간을 측량하는 도구가 아니라, 시간이 사람을 측량하는 도구로 보였다. 도구의 가운데에 가는 침이 한 가닥 있었고, 그 침이 사람의 호흡에 맞춰 가만히 움직였다.

"오셨네요. 한 분 더 같이 오셨군요."

남자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시선이 서연 쪽으로 한 호흡 머물렀다. 서연이 작게 자기 그림자를 다시 두 가닥에서 한 가닥으로 거두려 했지만, 거두어지지 않았다. 박물관 앞 광장에서는 사람의 진짜 그림자가 가만히 드러나는 자리였다.

남자가 메르 쪽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제 이름은 '율'이에요. 가락이라는 뜻이고요. 빙원 아래 옛 도시의 박물관장입니다."

옛 도시의 박물관장 율이 자기 이름을 건넸다.

"메르입니다. 이쪽은 토르고요. 옆에 같이 온 사람은 서연이에요."

메르가 작게 답했다. 자기 옆 사람의 정체를 율이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메르도 알았지만, 자기가 서연을 길동무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율 앞에서 가만히 분명히 했다. 사람이 자기 옆 사람의 정체를 알고도 자기가 그 사람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 앞에서 분명히 하는 일은, 자기 결심을 자기 입으로 한 번 더 새기는 의식이다.

율이 가만히 끄덕였다.

"세 분 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오세요. 둘째 갈래의 둘째 자리가 이 박물관 안에 있습니다."

"한 가지 여쭤 봐도 될까요?"

메르가 가만히 물었다.

"네."

"율 선생님께서도 어머니께 부탁을 받으신 분이세요?"

"네. 메르 어머님께서 50년 전에 이 박물관에 다녀가셨어요. 그때 저에게 한 가지를 부탁하고 가셨고요. 두 분이 둘째 갈래의 둘째 자리에 도착하시면, 옛 도시의 가락을 두 분께 풀어 드리라고요. 그리고 같이 오신 한 분의 가락도 가만히 같이 풀어 드리라고요."

"같이 오신 한 분의 가락도요?"

메르가 다시 물었다.

"네. 메르 어머님께서 50년 전에 이미 알고 계셨어요. 자기 가락 한 가닥이 비티움의 그릇 안에 들어가 50년 동안 자라난다는 사실을. 그 그릇이 두 분 옆에 길동무로 옮겨 오는 일도, 어머님께서 미리 짚어 두고 가셨어요."

서연의 가슴이 가만히 가라앉았다. 자기가 두 사람 앞에 나타난 일이 어머니의 부탁 안쪽에 미리 짚여 있던 일이라는 사실. 비티움이 자기를 보냈다고 50년 동안 가만히 믿고 있던 자기의 가락이, 사실은 어머니의 부탁 안쪽에 가만히 묶여 있던 가락이라는 사실. 자기가 누구의 그릇인지를 다시 묻게 되는 자리였다.

메르가 서연 쪽으로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서연이 한 호흡 멈췄다가, 가만히 손을 마주 잡았다. 두 사람의 손바닥이 가만히 닿았다. 어머니의 가락이 두 사람의 손바닥 사이에서 가는 가닥으로 흘렀다. 한 가닥은 메르 쪽에서, 한 가닥은 서연 쪽에서. 두 가닥이 손바닥의 가운데에서 한 박자에 만났다.

하늘이 보이지 않는 빙원 아래에서, 그러나 어딘가의 하늘에서, 별 열 개가 줄로 늘어선 채 가만히 머물러 있었다. 둘째 갈래의 첫 자리가 닫혔고, 둘째 자리의 문 앞에 네 사람이 가만히 서 있었다.

율이 박물관의 입구를 가만히 열었다.

(18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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