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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속 어딘가에 묻혀 있을, 우주 어딘가에 잠자고 있을, 지구 어딘가에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숨겨진 보물들을 같이 찾아봐요!
지리학자의 본질/지리소설 메르카토르

제16화 — 잠든 화산의 단오

by 덕지덕지 2026. 5. 20.

제16화 — 잠든 화산의 단오

— 1 —

절벽의 반대편에 화산섬 안쪽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가만히 열려 있었다.

검은 현무암이 사람 키 두 배쯤 갈라진 자리였다. 갈라진 안쪽이 자연의 가르마처럼 부드러웠다. 사람의 손이 깎은 것도, 도구가 잘라낸 것도 아니었다. 화산이 자기 호흡을 안쪽으로 거두는 박자에 맞춰 천천히 벌어진 입구였다. 영서가 그곳을 사람의 입구라 부르지 않고 화산의 숨구멍이라 부른 까닭이 그것이었다.

KA가 입구 앞에 가만히 멎었다. 외피의 옆구리가 작아지고, 발이 더 부드럽게 다듬어졌다. 좁은 길을 들어갈 수 있는 형태로 자기를 한 호흡 만에 다시 묶었다.

메르가 외투 안주머니에서 옛 등대의 불씨 주머니를 꺼냈다. 가죽 주머니 안쪽에서 가는 불 한 가닥이 가만히 떨고 있었다. 사람의 손이 다듬어도 다치지 않을 결의 불이었다. 메르가 손바닥 위에 그 불을 가만히 펴 놓았다.

"들어가요."

"응."

두 사람이 입구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비익조가 메르의 어깨 위에 옅게 깃을 다듬었다. KA가 두 사람의 한 걸음 뒤를 따라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입구의 안쪽 벽이 검었다. 사람의 손이 두 손바닥을 펴서 짚으면 벽이 가는 호흡으로 응답했다. 화산이 사람을 안쪽으로 받아 들이고 있다는 신호였다. 토르가 손바닥을 벽 옆에 가만히 댔다. 자기 가슴 안쪽의 검은빛이 손바닥 너머로 벽 안쪽의 검은 결과 한 박자에 닿았다. 가슴이 가만히 따뜻해졌다. 자기 안쪽에 14화 이후로 새로 흐르기 시작한 검은빛이 처음으로 자기 바깥의 검은빛과 직접 닿는 순간이었다. 사람이 자기 가슴 안쪽의 빛을 한 결로 알고 살아가다가 두 결로 알게 되는 순간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다시 묻게 되는 순간이다. 토르가 그 물음을 가슴 안쪽에서 가만히 굴려 보았다. 답은 아직 짚이지 않았다.

— 2 —

입구 안쪽으로 열 걸음쯤 들어갔을 때, 두 사람의 호흡이 가만히 느려졌다.

처음에는 두 사람 모두 알아채지 못했다. 호흡이 느려지는 일은 사람의 감각이 가장 늦게 알아차리는 일이다. 사람의 가슴이 평소보다 한 박자 길게 들이쉬었다 내쉬고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자기가 평소처럼 호흡한다고 가만히 믿고 있었다. 시간이 느려진 자리에서 사람의 시간은 평소처럼 흐른다고 사람 자신의 가슴이 거짓말을 한다.

메르가 처음으로 알아챈 것은 자기 손바닥 위의 불씨였다. 불씨의 떨림이 평소보다 한 박자 길게 늘어져 있었다. 한 호흡에 두 번 떨던 불이 한 호흡에 한 번씩만 떨고 있었다.

"시간이 느려지고 있어."

메르가 작게 음운을 옮겼다.

"불씨가 그러네."

"우리 호흡도 그래. 가슴 안쪽에서 한 박자 길게 들어가고 한 박자 길게 나오고."

토르가 자기 가슴 위에 손바닥을 가만히 댔다. 흰빛과 검은빛 두 가닥이 손바닥 안쪽에서 평소보다 한 박자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자기 안쪽의 시간이 자기 바깥쪽의 시간과 다른 박자로 흐른다는 시현의 풀이가, 자기 손바닥 안쪽에서 처음으로 또렷이 짚이는 자리였다.

시간이 느려진 자리에서 사람의 가슴 안쪽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것들이 가만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평소의 시간에서는 떠오를 자리가 없어서 가라앉아 있던 것들이다. 메르의 가슴 안쪽에서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12년 만에 처음으로 또렷이 떠올랐다. 메르가 열두 살, 학교에 가는 아침. 어머니가 부엌의 작은 식탁 옆에서 가만히 메르의 머리를 빗어 주시던 그 새벽. 빗의 결이 머리카락 사이를 한 줄씩 풀어 내리던 가는 흐름. 어머니의 손가락 끝이 빗 옆으로 가만히 따라오던 박자. 어머니의 입가에서 작게 새어 나오던 옅은 콧노래. 메르가 그 노래의 가사를 한 번도 묻지 않았다는 사실. 그것이 어머니의 마지막 새벽이 될 줄을 메르가 알지 못한 채로 학교에 갔다는 사실. 어머니가 그 다음 날 출장이라며 마을을 나가셨고, 다시 돌아오지 않으셨다는 사실.

메르의 눈가가 가만히 젖었다. 평소의 시간에서는 떠오르지 않던 슬픔이 시간이 느려진 자리에서 가만히 가슴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토르의 가슴 안쪽에서도 한 가지가 떠올랐다. 자기가 두 살 때 어머니가 자기 머리 위에 손바닥을 한 번 얹어 주셨던 그 단 한 번의 기억. 두 살의 아이가 평생을 기억할 수 있는 손길은 사람의 인생에서 보통 한두 번뿐이다. 그 한 번이 토르의 가슴 안쪽에서 평생 가라앉아 있었다. 어머니의 손바닥이 머리 위에 닿던 박자. 어머니의 손바닥 안쪽이 가만히 따뜻하던 결. 그 손바닥이 떠나면서 마지막에 가는 떨림으로 멎던 박자. 어머니가 그 다음 날 마을을 나가셨고, 다시 돌아오지 않으셨다.

두 사람이 같은 종류의 슬픔을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박자에 가슴 위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시간이 느려진 자리가, 두 사람을 자기들이 가장 오래 미루고 있던 슬픔의 자리로 데려가고 있었다.

— 3 —

통로의 끝에 둥근 동굴 하나가 가만히 열려 있었다.

동굴의 한가운데에 사람 하나가 가만히 앉아 있었다. 60대로 보이는 남자였다. 짙은 회색 옷. 머리가 길게 뒤로 단정히 묶여 있었고,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은 자세. 잠든 사람의 자세였지만, 잠든 채로 사람의 모양을 정확히 지키고 있는 자세였다. 두 눈이 감겨 있었고, 가슴팍이 가는 박자로 호흡했다. 사람의 평소 호흡보다 한 박자 더 깊은 호흡이었다.

메르가 외투 안주머니에서 검은 막대를 꺼냈다. 막대 끝을 사람의 옆 흙바닥에 가만히 댔다. 일곱 가닥의 측량선이 한 호흡에 그어졌다. 일곱 가닥 모두 사람의 가슴팍 한 점에서 멎었다.

"이 분이 단오 분이야."

메르가 작게 음운을 옮겼다.

토르가 자기 가슴 위에 손바닥을 가만히 댔다. 자기 흰빛과 검은빛 두 가닥이 손바닥 너머로 단오의 가슴팍에 닿았다. 단오의 호흡이 한 박자 가지런해졌다. 두 눈꺼풀이 가는 떨림으로 떠졌다.

단오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음운이 사람의 음운이었지만, 평소의 사람보다 한 박자 느린 가락이었다.

"오셨네요."

"단오 분이세요?"

메르가 물었다.

"단오라고 해요. 끝과 시작이 한 글자에 묶인 이름이고요. 메르 양 어머님께서 50년 전 저에게 그 이름을 지어 주셨어요. 한낮을 지키는 사람이라고요. 북방에 한낮이 없으니까, 사람의 한낮을 안쪽에서 지켜야 한다고요."

화산 안쪽의 옛 시간 학자인 단오가 자기 이름을 건넸다.

"50년 동안 한낮을 지키신 거예요?"

"바깥의 시간으로 50년이지요. 안쪽의 시간으로는 한 50시간쯤이에요. 화산 안쪽의 시간이 바깥의 720배 정도 느려요. 그러니 저에게는 어머님께서 가신 지가 두 사흘 정도예요."

메르의 가슴이 가만히 가라앉았다. 자기가 어머니의 부재를 12년 동안 가슴 안쪽에 안고 살아왔는데, 단오에게는 그 부재가 두 사흘이었다. 같은 시간이 사람에 따라 그렇게 다른 무게로 흐른다는 사실. 그것이 시간의 가장 잔인한 결이었다. 한 사람에게는 평생인 시간이 다른 사람에게는 사흘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어머님께서 두 분께 한 가지를 부탁하고 가셨어요."

단오가 가만히 이어 갔다.

"제가 깨어나면서 두 분께 시간의 가락을 새겨 드려야 한다고요. 그 가락이 두 분 가슴 안쪽에 새겨지면, 비티움이 두 분의 시간을 흩으려 해도 두 분이 가만히 자기 박자를 지킬 수 있다고요."

"비티움이 우리 시간을 흩으려 한다고요?"

토르가 물었다.

"비티움의 작동 방식이 그래요. 사람의 시간을 흩어서 사람이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방식. 시현 분이 본체에서 끊겨 나오면서 시간이 흐트러진 것도 그 작동 방식의 한 결과예요. 사람의 시간이 흩어지면 사람이 자기 이름을 잊고, 자기 이름을 잊으면 사람이 자기를 알아보지 못해요."

단오가 가만히 자기 가슴팍에 손바닥을 댔다. 가슴 안쪽에서 가는 시계 같은 가락이 한 박자에 새어 나왔다. 시간의 가락이었다.

"두 분, 무릎을 굽혀 가까이 오세요."

메르와 토르가 단오 옆에 가만히 무릎을 굽혀 앉았다. 단오가 두 사람의 가슴팍 한가운데에 자기 손바닥을 차례로 가만히 얹었다. 손바닥의 닿음이 가벼웠다. 그러나 그 닿음 너머에서 가는 시계 가락이 두 사람의 가슴 안쪽에 한 박자씩 새겨졌다.

두 사람의 가슴 안쪽에서 시간이 가만히 자기 박자를 찾았다.

메르가 가슴 안쪽 깊은 곳의 슬픔이 가만히 자리잡는 결을 느꼈다. 어머니의 마지막 새벽이 자기 가슴 안쪽에서 새겨졌다가,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있게 되었다. 슬픔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리를 찾아 가는 결이었다. 시간이 사람의 슬픔을 지우는 일이 아니라, 슬픔을 자기 자리에 가만히 놓아 두는 일이라는 사실. 메르가 그 사실을 처음으로 받아 들였다.

토르가 가슴 안쪽의 검은빛이 흰빛 옆에 가만히 자리잡는 결을 느꼈다. 한 평생 흰빛만 흐르던 자리에 검은빛이 새로 흐르면서 자기가 누구인지 가만히 흔들리던 가닥이, 단오의 시계 가락 옆에서 자기 자리를 찾았다. 사람이 자기 안쪽에 두 결의 빛을 가지고도 자기를 알아볼 수 있다는 사실. 두 결의 빛이 한 사람을 두 사람으로 나누는 일이 아니라, 한 사람을 더 깊은 한 사람으로 만든다는 사실. 토르가 그 사실을 처음으로 받아 들였다.

— 4 —

단오가 가만히 손바닥을 거두었다. 두 사람의 가슴 안쪽에 시계 가락이 새겨진 채로 머물러 있었다.

"이제 둘째 갈래 첫 자리가 닫혔습니다."

단오가 가만히 음운을 옮겼다. 메르의 막대 끝이 동굴 흙바닥에 옅게 한 호흡 더 떨었다. 일곱 가닥의 측량선이 가만히 가지런해졌다. 자기들의 의식이 한 자리를 닫았다는 신호였다.

단오가 자기 옆 작은 가죽 주머니를 들어 메르에게 가만히 건넸다.

"북방 빙원의 옛 도시로 가시는 열쇠예요. 그 도시 입구에 이 주머니를 보이시면 안쪽으로 들어가실 수 있어요."

메르가 주머니를 받아 외투 안주머니에 넣었다. 안주머니의 짐이 한 가지 더 늘었다.

"단오 분께서는 이제 어떻게 되세요?"

메르가 물었다.

"잠시 다시 잠들어요. 한낮을 지키는 일은 끝나지 않습니다. 다만 두 분께 시계 가락을 새겨 드렸으니, 제가 잠들어 있어도 두 분께 한낮의 흐름이 흘러갑니다. 두 분이 다섯째 갈래에 닿으실 때까지요."

"고맙습니다, 단오 분."

"한 가지 더 알려 드릴 게 있어요."

단오가 가만히 메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두 분이 화산 바깥으로 나가시면, 절벽 옆에 한 사람이 두 분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두 분 또래의 사람. 자기 이름을 건네면서 자기가 두 분의 길동무가 되겠다고 말할 사람."

"영서 분께서 미리 일러 주셨어요. 비티움의 사람이라고요."

"맞아요. 그 사람의 그림자가 두 가닥으로 깔립니다. 단오가 한 가지 더 알려 드리고 싶은 게, 그 사람의 본체 가락이에요."

"본체 가락이 뭐가 특이해요?"

메르가 가만히 물었다. 단오의 가슴 안쪽에서 가는 시계 가락이 한 호흡 무거워졌다.

"메르 양 어머님의 본체 가락과 한 결 비슷해요. 비티움이 어머님의 가락 한 가닥을 빌려다가 그 사람을 만들어 두었어요. 그래서 메르 양께서 그 사람을 처음 보시는 순간, 가슴 안쪽이 가만히 따뜻해질 거예요. 어머님의 가락이 그 사람 안쪽에서 옅게 흐르고 있으니까요."

메르의 가슴이 가만히 가라앉았다. 비티움이 페트로나스의 이슬을 어머니의 미소로 빚어 둔 것처럼, 둘째 갈래에서는 어머니의 본체 가락 한 가닥을 빌려다가 한 사람의 친구를 만들어 두었다. 사랑은 늘 누군가의 잠을 대가로 한다. 어머니의 사랑이 자식을 잠재우지 않는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다른 누군가의 잠을 대가로 한 사랑이다. 비티움의 작동 방식이 그 잔인한 결을 메르에게 가만히 들이대고 있었다.

"그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해요?"

메르가 물었다.

"두 분이 결정하시는 일이에요. 베셔도 되고, 안 베셔도 되고. 같이 가셔도 되고, 가지 말라 하셔도 되고. 다만 한 가지를 잊지 마세요. 그 사람이 두 분 옆에서 가는 가닥으로 두 분의 가락을 흘리려 할 거예요. 두 분의 의식의 흐름을 한 호흡씩 옅게 풀어 두는 결로."

단오가 가만히 두 눈을 다시 감기 시작했다. 두 손바닥을 무릎 위에 다시 가지런히 모은 자세. 잠시 잠드는 본체의 자세였다.

"또 뵙겠어요, 두 분."

"또 뵐게요, 단오 분."

메르가 작게 음운을 옮겼다.

두 사람이 동굴에서 천천히 발을 옮겼다. KA가 통로 안쪽에서 두 사람을 받아 들였다. 화산 안쪽의 가는 시간이 두 사람의 발자국 아래에서 점차 바깥의 시간 쪽으로 옅게 돌아왔다. 호흡이 다시 평소의 박자로 가지런해졌다. 그러나 가슴 안쪽 가장 깊은 곳에 새겨진 시계 가락은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두 사람의 슬픔이 자기 자리를 찾은 채로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화산섬 바깥으로 다시 나왔을 때, 새벽의 빛이 한 가닥 더 짙어져 있었다.

절벽의 자갈밭 옆에 사람 하나가 가만히 서 있었다.

두 사람 또래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짙은 청색 외투. 어깨를 살짝 늘어뜨린 자세. 입가에 가는 미소 한 줄. 사람의 모양이 어딘가 익숙했다. 메르의 가슴 안쪽이 가만히 따뜻해졌다. 단오가 미리 풀어 준 그 결이었다. 어머니의 본체 가락이 그 사람 안쪽에서 흐르고 있다는 신호.

사람의 발 아래에 두 가닥의 옅은 그림자가 가만히 깔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사람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음운이 부드러웠다. 자기 이름을 건네기 전에 가는 미소부터 보낸 사람의 친절이었다.

"제 이름은 서연이에요. 두 분의 길동무가 되고 싶어서 왔어요."

(17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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