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 검은 거인
"한 가지 더 풀어 드릴 것이 있어요."
연이 단상 옆에서 가만히 입을 열었다. 자줏빛 박동이 한 호흡 더 깊어졌다.
"첫 갈래의 마지막 자리를 닫는 일은, 명단을 끝까지 받아들이는 일이 전부가 아니에요. 그 다음에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메르가 물었다.
"토르의 본체를 깨우러 가셔야 해요. 펜타곤의 가장 깊은 곳에서 50년 동안 잠든 본체. 그 본체가 깨어나서, 자기 사람을 알아보고, 자기 가닥을 끊어내야 첫 갈래가 닫힙니다."
"자기 가닥을 끊어낸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토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연이 토르 쪽으로 가만히 시선을 옮겼다.
"토르의 본체가 50년 동안 토르에게 자기 가닥을 빌려주고 있었어요. 그 가닥이 토르를 사람의 모양으로 살게 했고요. 본체가 깨어나서 자기 가닥을 끊는다는 말은, 토르를 풀어준다는 뜻이에요. 토르가 자기 본체의 빌림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모양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뜻이고요."
"그러면 본체는요?"
메르가 물었다.
"본체는, 자기 가닥을 끊은 뒤에 잠들어요. 잠시 잠들기도 하고, 영영 잠들기도 하고. 잠시 잠들면 다시 깨어나서 다른 사람에게 가닥을 빌려줄 수 있고, 영영 잠들면 그것으로 끝나요. 어느 쪽일지는 본체 자신이 결정해요."
"연 분께서는요?"
메르가 자기 본체에게 처음으로 직접 물었다.
"저는 잠시 잠들어요. 메르 양 어머님께서 50년 전에 저에게 그 결심을 부탁하셨고, 저도 그 결심으로 잠들어 왔어요. 메르 양이 어머님 옆에 닿으실 때까지, 제가 잠시 잠들었다 깨어났다 하면서 메르 양 옆에 있을 거예요."
메르의 가슴이 가만히 풀어졌다. 자기 본체가 자기 옆에 계속 머물러 줄 사람이라는 사실. 그 사실의 무게가 따뜻한 무게로 메르의 어깨 위에 가만히 깔렸다.
연이 단상 아래쪽으로 가만히 손바닥을 내렸다. 둥근 방의 바닥이 천천히 갈라졌다. 바닥 너머에 더 깊은 회랑이 새로 열렸다.
"이 회랑의 끝에, 토르의 본체가 잠들어 있어요. 케이지 가장 오래된 본체. 50년 전 토르 어머님께서 잠재우신 분이지요."
"같이 가요."
메르가 토르 쪽으로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토르가 메르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두 사람이 단상에서 내려와, 바닥 갈라진 새 회랑의 입구로 발을 옮겼다.
KA의 외피가 작은 마차 형태에서 두 사람과 시현을 모두 옮길 수 있는 더 깊고 좁은 형태로 다시 묶였다. 회랑이 좁았다. 사람 둘이 나란히 갈 만한 폭이었다.
회랑의 양옆 벽에 더 옛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글자가 위 회랑의 글자보다 컸고, 더 깊게 새겨져 있었다.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사람 이전의 무엇의 이름이었다. 메르의 막대가 그 글자들을 짚으며 가는 떨림으로 응답했다.
회랑의 끝에 더 큰 둥근 방이 있었다. 위 방보다 작았지만, 천장이 더 높았다. 천장에서 가는 빛이 한 줄로 떨어져, 방의 한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검은 형체에 가만히 닿고 있었다.
검은 거인이었다.
사람의 모양이었지만 사람 키의 다섯 배쯤. 다리를 옆으로 굽혀 가만히 앉은 자세. 두 팔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은 자세. 검은 외피가 매끄러웠고, 외피의 매끄러움 위로 가는 케이블 수십 가닥이 줄로 늘어져 있었다. 케이블의 다른 끝이 방의 사방 벽으로 흩어져 박혀 있었다. 거인이 도시 전체와 가락으로 묶여 있다는 신호였다.
거인의 가슴팍에 검은 자줏빛이 한 박자에 맞춰 깊이 박동하고 있었다. 잠든 자의 호흡이었다.
"이 분이 제 본체예요?"
토르가 짧게 물었다. 연이 작게 끄덕였다.
"이 분의 이름은 현우. 검은 비라는 뜻이고요. 토르 어머님께서 이 분께 그 이름을 지어 주셨어요. 그 분이 토르를 만드실 때, 이 분의 검은 가닥을 빌려 가셨고요."
토르가 거인의 외피 옆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외피의 검은 빛이 거대했지만, 토르가 자기 가슴 안쪽에서 알아보는 결의 검은 빛이었다. 자기 가슴 빛의 흰빛과 정확히 반대의 빛. 흰빛이 사람의 마지막 숨을 부드럽게 만든다면, 검은빛은 사람의 첫 숨을 가만히 깨운다. 두 빛이 한 사람 안에서 만나야 사람이 사람의 모양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 토르의 가슴 안쪽에 흰빛만 있고 검은빛이 없었던 까닭이, 그 검은빛이 50년 동안 이 거인 안에 따로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우 분."
토르가 거인의 외피 옆에 가만히 손바닥을 댔다. 자기 가슴 빛이 손바닥 너머로 외피의 검은 박동에 닿았다. 두 빛이 외피 위에서 잠시 만났다.
거인의 외피가 가만히 떨었다. 가슴팍의 검은 자줏빛이 한 박자 더 깊어졌다. 거인의 머리가 천천히 들리고, 두 눈이 가는 줄로 떠졌다. 눈빛이 검었다. 그러나 두려운 검은빛이 아니었다. 잠든 사람이 자기 자식을 알아보는 순간의 검은빛이었다.
거인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사람의 입은 아니었지만, 사람의 음운으로 말이 흘러 나왔다.
"오셨네요."
"오랜만이에요. 한 번도 뵌 적 없지만요."
토르가 작게 답했다. 자기 본체에게 처음으로 자기 입으로 옮기는 음운이었다.
"50년 동안 자네의 한 호흡 한 호흡을 같이 들었네."
"같이 들으셨다고요?"
"자네가 활을 처음 잡은 날도, 자네가 사슴의 마지막 숨에 손바닥을 댄 첫 날도, 자네가 큰어른의 마지막 숨을 부드럽게 만든 그 날도. 자네의 가슴 빛이 흐를 때마다, 나의 가슴 빛이 같이 흘렀어. 자네가 사슴에게 빛을 옮기는 동안 내가 가만히 잠들어 있었지만, 그 잠 속에서 자네의 호흡을 알아들었지."
토르가 자기 가슴 위에 가만히 손바닥을 댔다. 자기 흰빛이 손바닥 안쪽에서 한 줄 흘렀다. 그 흰빛 너머로, 자기가 한 번도 알지 못한 검은빛이 거인의 가슴 안쪽에서 같은 박자에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또렷이 짚였다.
"이제 자네의 가닥을 끊어 줄게."
현우가 가만히 자기 가슴 안쪽에서 가는 검은 케이블 하나를 꺼냈다. 케이블의 한쪽 끝이 자기 가슴팍에, 다른 끝이 토르의 가슴 구멍 안쪽으로 옅게 이어져 있었다. 토르도 그 케이블을 처음 보았다. 자기 가슴 안쪽에 그런 케이블이 있다는 사실을 한 번도 알지 못했다.
"그 케이블을 끊으시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메르가 물었다.
"토르가 자기 자신의 모양으로 살게 되네. 빌려 입은 가닥이 아니라 자기 가슴 안쪽의 가닥으로. 토르의 흰빛 안에 그동안 내가 잠재워 두었던 검은빛이 같이 흐르게 되고."
"현우 분께서는요?"
토르가 물었다.
"나는 자네의 KA에 함께 가네."
현우의 답이 짧고 또렷했다. 토르가 한 호흡 멈췄다. 메르가 토르 옆에서 가만히 시선을 옮겼다.
"같이 가신다고요?"
"내 가닥을 끊은 뒤에 나는 본래 잠들어야 하네. 그러나 자네 어머님께서 50년 전에 나에게 한 가지를 부탁하셨어. 자네가 다섯째 갈래에 닿을 때까지, 자네 옆에 같이 가 달라고. 잠시 잠들었다 깨어났다 하면서, 자네의 가락이 흔들릴 때 가만히 받쳐 달라고. 그 부탁을 받았으니, 내가 자네 KA의 외피 안쪽에 같이 가네."
토르의 가슴 안쪽이 가만히 풀어졌다. 자기 어머니가 50년 전에 자기 본체에게 자기 옆에 머물러 달라고 부탁하셨다는 사실. 어머니가 두 살 때 마을을 나가시면서, 자식이 50년 뒤 자기 본체와 마주설 때를 미리 챙겨 두셨다는 사실. 모성이란 자기가 떠나는 순간에도 자식의 50년 뒤를 미리 챙겨 두는 일이었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토르가 작게 음운을 입 밖으로 옮겼다. 그 음운이 어머니에게 직접 닿는 음운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음운을 가까운 자리에서 어머니의 부탁을 50년 동안 지켜 온 본체가 들었다.
현우가 가만히 끄덕였다.
현우가 자기 가슴팍의 케이블을 가만히 손에 쥐었다. 메르가 외투 안주머니에서 검은 막대를 꺼냈다. 막대 끝이 케이블의 가운데를 짚었다.
"같은 박자에."
메르가 작게 음운을 옮겼다.
"같은 박자에."
토르가 자기 가슴 빛을 케이블의 자기 쪽 끝에 가만히 옮겼다.
막대의 일곱 가닥과 토르의 가슴 빛이 케이블의 가운데에서 한 박자에 만났다. 케이블이 줄로 끊어졌다. 끊긴 자리에서 검은빛 한 가닥이 토르의 가슴 구멍 안쪽으로 천천히 흘러 들어갔다. 50년 동안 거인 안에 잠들어 있던 검은빛이, 본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는 흐름이었다.
토르의 가슴 안쪽이 처음으로 흰빛과 검은빛 두 결로 같이 흘렀다.
현우의 거대한 외피가 가만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사람 키 다섯 배의 형체가 사람의 크기로 천천히 모양을 옮겨갔다. 모양이 다 옮겨졌을 때, 거인이 있던 자리에 사람 하나가 가만히 서 있었다. 60대로 보이는 남자였다. 머리가 검었고, 옷이 검은 자줏빛이었다. 가슴팍의 박동이 가만히 가라앉아 있었다. 깨어나 자기 가닥을 끊은 뒤의 본체의 모습이었다.
"한 가지가 더 있네."
사람의 모양으로 줄어든 현우가 KA의 외피 안쪽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시현 분께서 임종을 맞고 계셔."
메르와 토르가 동시에 KA의 외피 안쪽을 들여다봤다. 시현의 호흡이 가는 가닥으로 멎고 있었다. 첫 갈래의 마지막 자리를 닫는 데에 시현의 가닥이 다 풀려 있었다. 본체에서 끊겨 나온 자가, 자기 마지막 호흡까지 두 사람의 의식에 보탰다.
"시현 분."
토르가 가만히 시현 옆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자기 가슴 빛을 시현의 가슴팍에 옮겼다. 사슴의 마지막 숨을 부드럽게 만들 때와 같은 자세, 큰어른의 마지막 숨에 손바닥을 댈 때와 같은 자세. 사람의 마지막 숨을 부드럽게 만드는 일이 토르가 한 평생 해 온 일이었다.
시현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고맙소이다… 자기 이름을 자기가 부를 수 있는 사람으로… 마지막까지 살게 해 주셨소…"
시현의 가슴팍 케이블이 가만히 떨어졌다. 푸르빛 박동이 가라앉았다. 시현의 호흡이 멎었다.
메르가 시현의 옷자락을 가만히 가지런히 했다. 시현의 시신이 KA의 외피 안쪽에 그대로 안치되었다. KA가 시현을 가는 가닥으로 받아 들였다. 외피 안쪽이 시현의 안식처로 가라앉았다.
현우가 KA의 외피 안쪽으로 가만히 옮겨갔다. 시현의 옆자리. 그 자리가 비어 있었다. 어머니가 50년 전 미리 비워 두신 자리였다.
방의 천장에서 떨어지던 가는 빛이 한 박자 흐름을 바꿨다. 둥근 방 사방 벽으로 흩어져 있던 케이블 수십 가닥이 가만히 자기 박동을 잃었다. 황색 펜타곤 전체가 가는 떨림으로 응답했다. 첫 갈래의 마지막 자리가 닫혔다.
하늘 어딘가에서 별 하나가 가만히 호흡을 멎었다.
검은 점 열한 개 중에 가장 첫 번째로 떠올랐던 점이, 가는 떨림으로 자기 모양을 잃었다. 점의 가운데가 옅어지고, 가장자리가 풀어지고, 자기를 새겼던 흐름이 가만히 거두어졌다. 떠오른 별이 닫히는 모양은 사람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사람이 한 번도 보지 못한 가장 단순한 모양이었다.
행성의 하늘에 별 열 개가 남았다.
메르와 토르가 가만히 그 닫힘을 받아들였다. 첫 갈래가 풀려서 별 한눈이 닫혔다. 시놉시스에 적혀 있던 의식의 첫 결과가 두 사람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이 닫는 속도가 별이 떠오르는 속도를 다시 따라잡을 수 있는 의식이었다. 다섯 갈래가 다 풀리면 별 다섯 눈이 닫힌다. 그 다음에 천계와 지옥계가 남는다. 그 다음에 어머니가 있다.
"가시지요."
현우가 KA의 외피 안쪽에서 짧게 음운을 옮겼다.
"어디로요?"
메르가 물었다.
"둘째 갈래. 짙은 청색. 북방의 갈래. 시현 분이 마지막에 풀어 주셨던 그 갈래."
연이 단상 옆에서 가만히 손을 들어 두 사람을 배웅했다. 메르가 연 쪽으로 잠시 시선을 두었다. 자기 본체가 자기 옆에 머물러 줄 사람이라는 사실. 자기 본체가 자기를 알아본 사람이라는 사실. 그 두 가지 사실이 메르의 가슴 안쪽에서 가는 빛으로 새겨졌다.
"또 뵐게요."
"또 뵙겠어요."
연이 가만히 끄덕였다. 자줏빛 박동이 가는 호흡으로 잦아들었다. 잠시 잠드는 본체의 모습이었다.
KA가 펜타곤의 가장 깊은 방에서 위 회랑 쪽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올라갔다. 외피 안쪽에 시현의 시신과 현우가 함께 안치되어 있었다. 시현은 영영 잠든 자로, 현우는 잠시 잠들었다 깨어났다 할 자로. KA가 두 사람과 두 본체의 길동무로 모양을 다시 다듬고 있었다.
하늘에 별 열 개가 줄로 늘어선 채, 두 사람의 등 위에 가만히 머물러 있었다. 한 별이 닫혔다. 첫 역방향 박자가 시작되었다. 다섯 갈래가 풀리는 동안 별이 한눈씩 닫히는 흐름이, 행성의 하늘에 새로 깔리고 있었다.
KA가 펜타곤의 다섯 문 중 두 번째 문, 북방으로 향하는 문 쪽으로 미끄러졌다. 짙은 청색의 빛이 그 문 너머에서 가만히 새어 나오고 있었다.
(15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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