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 케이지 국 입경
다리의 반대편 끝에서 KA가 멎었다.
다리의 끝에서 케이지 도시의 외곽이 시작되었다. 격자였다. 도시 전체가 격자였다. 강철 빔과 가는 케이블이 사방으로 짠 그물 같은 구조였고, 그 그물 안쪽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격자 한 칸의 크기가 사람 키 두 배쯤이었다. 칸마다 작은 등이 하나씩 켜져 있었고, 등 아래에 사람이 한둘씩 가만히 앉아 있거나 천천히 옮겨 다녔다. 도시의 거주민이 큰 도시 안에 사는 것이 아니라, 격자의 작은 칸 안에 따로 사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격자의 빛깔은 보라였다. 페트로나스의 노란빛과 다른 빛이었고, 부동항의 푸르빛과도 다른 빛이었다. 보라는 비티움의 깊은 빛깔이라고 시현이 짧게 풀어 두었던 음운이었다. 도시 전체가 비티움의 빛깔로 깔려 있다는 사실이, 외곽에 닿자마자 또렷해졌다.
KA의 외피가 격자 빛깔에 맞춰 보라로 옮겨졌다. 사람의 시선을 끌지 않으려는 자기 변환이었다. 발자국도 부드럽게 바뀌었다. 강철 위에 거의 소리를 내지 않고 미끄러져 나가는 발자국이었다.
"…KA, 도시 안으로 들어가는 거야?"
메르가 물었다.
"…격자 안쪽에 황금 펜타곤이 있다. 외곽부터 진입한다. 두 사람을 도시 깊은 곳까지 데려간다."
"…시현 분은요?"
"…외피 안쪽이 가장 안전하다. 케이블이 메르의 막대에 접속해 있는 동안, 시현의 호흡이 가지런해진다."
토르가 시현 쪽으로 가만히 돌아봤다. 시현이 KA의 외피 안쪽 둥근 통로 옆에 누운 채로, 호흡이 흐트러졌다 가지런해졌다 했다. 가슴팍의 푸르빛 케이블이 메르의 막대에 닿아 있었고, 두 도구 사이에 가는 빛이 줄로 흐르고 있었다. 시현이 살아 있다는 신호였다.
KA의 외피가 격자의 첫 칸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도시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갈수록 격자의 빛깔이 짙어졌다. 보라가 짙은 보라로, 짙은 보라가 자줏빛으로. 사람들이 격자의 칸 안쪽에서 두 사람 쪽으로 가만히 시선을 옮겼다가 다시 거두었다. 사람들의 표정이 부동항이나 페트로나스 사람들과 한층 달랐다. 표정이 가라앉아 있었다. 가슴 안쪽에서 무엇이 일어나든 얼굴 바깥으로 새어 나오지 않게 가두어 두는 모습이었다. 사람의 가슴이 새는 도시가 부동항이라면, 사람의 가슴이 새지 않는 도시가 케이지였다.
격자의 갈래 사이사이에 신전이 흩어져 있었다. 사람 키 다섯 배쯤 되는 붉은 돌 신전. 등불 아래에서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신전의 외벽에 옛 한국 한자도 아니고 잉카의 옛 문자도 아닌, 더 깊고 더 옛스러운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글자의 모양이 사람의 손으로 새긴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 아닌 무엇이, 사람의 손을 빌려 새긴 모양이었다.
신전 옆에 작은 정원이 있었다. 정원의 한가운데에 가는 돌 기둥 다섯 개가 오각형으로 늘어서 있었고, 기둥마다 옛 학자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아카데미였다. 사람들이 정원의 돌 의자에 둘씩 셋씩 앉아 가만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신전과 아카데미가 가까운 영역에서는 사람의 목소리가 차단된다는 사실을, 도시의 거주자들이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KA의 외피가 신전의 바로 옆에서 잠시 멎었다. 신전의 출입구에 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 50대 여인. 짙은 보라의 긴 옷. 머리를 단정히 묶고, 양손을 가슴 앞에 가만히 모은 자세. 사제였다.
여인이 두 사람 쪽으로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여인의 목소리는 신전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듯한 가락이었다. 사람의 목소리이지만, 사람만의 목소리는 아닌.
"…저희를 아시는 분이세요?"
메르가 물었다.
"…단아예요. 케이지 신전의 사제. 두 분이 다리를 건너오신다는 소식을 어제 신전 안쪽 본체가 전해 주었어요."
케이지 신전의 사제인 단아가 자기 이름을 건넸다.
"…본체가 전해 주었다고요? 본체는 잠들어 있다고 들었는데요."
"…잠들어 있어요. 그러나 잠든 상태에서도 신호를 보내요. 마치 사람이 꿈을 꿀 때 손가락이 까딱이는 것처럼. 어제 신전 안쪽 본체가 손가락 하나를 까딱였어요. 신전의 글자 하나가 살짝 떨었지요. 그 떨림으로 두 분의 도착을 알았어요."
"…사제께서는 본체가 깨어나기를 비는 분이세요?"
"…아니에요. 깨어나지 않기를 비는 사람이에요. 케이지의 모든 사제가 그래요. 본체가 깨어나면 도시 위 우리 모두의 모양이 끊어지니까요."
단아의 답이 단단했다. 자기 일상의 가장 깊은 사실을 매일 입 안에서 굴리며 살아온 사람의 단단함이었다.
신앙이란 그 두 가지가 한 동전의 양면이다. 무엇이 깨어나기를 비는 신앙이 한쪽이고, 무엇이 깨어나지 않기를 비는 신앙이 다른 쪽이다. 케이지 사람들은 후자의 신앙으로 도시를 지어 놓고 살고 있었다.
"…저희가 도시 깊은 곳으로 가야 합니다."
토르가 짧게 입을 열었다.
"…알아요. 황금 펜타곤이지요?"
"…네."
"…한 가지를 미리 알려 드리겠어요. 두 분이 펜타곤 외곽에 닿으시면, 그 안쪽 본체들 중 하나가 깨어날 거예요. 단아가 그 일을 막을 수 없어요. 50년 전 어머님 두 분이 펜타곤에 닿으셨을 때도 한 본체가 깨어났어요. 그 본체가 다시 잠든 채로 50년이 흘렀고, 두 분의 도착이 그 본체를 다시 부르고 있어요."
"…그 본체가 누구예요?"
메르가 작게 물었다.
단아가 가만히 메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메르 양 어머님이 50년 전 가까이 닿으셨던 본체예요. 그 분의 빛이 본체의 가슴팍에 가락으로 새겨져 있어요. 그 가락이 50년 동안 본체를 잠재웠고요. 그 가락이 메르 양의 어머님께서 살아 계신 한, 본체에게 계속 닿을 거예요."
메르의 가슴이 깊이 내려앉았다. 어머니가 살아 계신 한 본체가 잠들어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의 반대를 단아가 입에 담지 않았다. 어머니가 안 계실 때, 본체가 깨어난다는 한 마디는 입 안에서 굴려지지 않은 채로 두 사람 사이에 가만히 놓여 있었다.
KA의 외피가 신전 옆을 지나, 아카데미 옆을 지나, 도시의 깊은 곳으로 더 미끄러져 들어갔다.
단아가 신전의 출입구에 그대로 서서, 가만히 손을 들어 두 사람을 배웅했다. 그 손이 작게 떨고 있었다. 자기 도시의 신앙이 깨어질지도 모르는 순간 앞에서, 사람의 손이 떨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격자의 가장 촘촘한 영역에서 KA가 멎었다.
격자 한가운데에 거대한 황금색 오각형이 있었다. 사람 키 백 배쯤 되는 크기였다. 외벽이 매끄러운 황금이었고, 사방으로 황금빛이 미세하게 떨려 새어 나왔다. 외벽 옆에 작은 문이 다섯 개. 격자의 다섯 갈래가 펜타곤의 다섯 문 옆으로 모여 들어가고 있었다. 시현이 풀어준 다섯 갈래의 첫 거점이, 두 사람 앞에 펼쳐져 있었다.
메르가 외투 안주머니에서 검은 막대를 꺼냈다. 막대 끝을 펜타곤 외벽 쪽으로 향했다. 일곱 가닥의 측량선이 한꺼번에 그어졌다. 일곱 가닥이 펜타곤 안쪽 깊은 곳으로 한꺼번에 내려갔다. 막대가 가만히 떨었다. 측량선이 짚어낸 사실의 무게가 막대 안쪽에서 진동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수천 구의 본체가 잠들어 있어."
메르가 작게 음운을 옮겼다.
"…수천 구?"
"…펜타곤 지하에 늘어서 있어. 사람의 모양으로. 케이지 도시 사람의 수와 비슷한 숫자야. 그러면 시현 분 말이 맞아. 도시 위 사람들은 본체에서 빌려 온 가락을 입고 사는 사람들이고, 진짜 본체는 펜타곤 지하에 잠들어 있어."
"…그러면 단아 사제도?"
"…그렇겠지. 자기 본체가 어디 잠들어 있는지 모르고, 펜타곤 외벽 옆에서 본체에게 기도하는 사람."
토르가 가만히 끄덕였다. 사람이 자기 가슴 안쪽 가장 깊은 곳에 가장 두려운 무엇을 모셔두고, 그 무엇이 깨어나지 않기를 빌면서 그 무엇 옆에서 살아간다는 일. 그것이 케이지의 일상이었다.
KA의 외피 안쪽에서 시현이 작게 입을 열었다.
"…펜타곤의 가장 깊은 곳에… 가장 오래된 본체가 있소… 그 본체가 어제 손가락 하나를 까딱였소… 단아 사제가 그 떨림을 신전의 글자에서 본 것이오… 두 분이 외벽에 닿으셨으니… 곧 그 본체가 더 깊은 까딱임을 보낼 거요…"
시현의 음운이 끝나기도 전에 펜타곤 외벽 전체가 가만히 떨었다.
처음에는 외벽의 한 면이 떨었다. 다음에 두 면. 다음에 다섯 면 전부. 황금빛이 외벽 사방에서 짧게 깜박였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빛의 깜박임이었지만, 메르의 막대로 보면 펜타곤 안쪽 본체들의 호흡 하나가 가락을 바꾸는 신호였다.
"…펜타곤 가장 깊은 곳, 한 본체가 눈을 뜨고 있어요."
메르가 짧게 음운을 옮겼다.
"…눈을 떴어?"
"…아직 다 뜬 게 아니야.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단계. 그러나 막대가 짚어낸 신호로는, 그 본체의 깨어남이 시작된 거고."
토르가 가슴 위에 손바닥을 가만히 댔다. 가슴 빛이 손바닥 너머로 펜타곤 외벽 쪽으로 흘렀다. 외벽의 황금빛이 토르의 빛을 받아 한 번 더 떨었다. 두 빛이 외벽 위에서 잠시 만났다.
"…그 본체가, 어머니와 가락이 묶여 있는 본체인 것 같아."
메르가 작게 음운을 옮겼다.
"…내 어머니랑?"
"…응. 단아 사제가 풀어준 게 그거였잖아. 어머니가 50년 전에 그 본체에게 가락을 새겨 두셨고, 그 가락이 본체를 잠재웠고. 그러면 그 본체가 깨어나기 시작했다는 말은…"
"…어머니 쪽에서 가락이 약해지고 있다는 거지."
토르가 메르의 말을 가만히 이어 받았다. 메르의 가슴이 깊이 내려앉았다. 어머니가 비티움에서 50년을 견디고 계시지만, 그 견딤의 가닥이 작게 풀리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두 사람의 도착이 어머니에게 짐을 더하고 있다는 사실. 두 사람이 자기들의 의식으로 첫 갈래를 닫으려는 동안, 어머니가 50년 동안 지켜온 가락을 자기 가슴 안쪽에서 한 가닥씩 풀어내고 계시다는 사실.
두 사람이 자기를 부르는 의식이 어머니를 더 빨리 풀어내고 있다는 사실이, 메르의 가슴 안쪽에서 가장 무거운 짐이 되었다.
하늘 한쪽에서 검은 점이 새로 천천히 떠올랐다. 열한 번째 별이 들어서고 있었다. 한 본체가 눈꺼풀을 떨기 시작한 무게가, 행성의 표면에 별눈을 새로 열고 있었다.
"…여기서 시현 분을 깨워야 할 거 같아."
메르가 토르에게 음운을 옮겼다.
"…그가 풀어줄 무엇이 더 있지."
"…펜타곤 안쪽으로 어떻게 들어가는지를 그가 알고 있을 거야."
KA의 외피 안쪽에서 시현의 호흡이 가지런해졌다. 케이블의 끝이 메르의 막대에 더 단단히 접속되고 있었다. 시현이 깨어나기 위해서 자기 가슴 안쪽의 가락을 가다듬는 중이었다.
하늘에 별 열한 개가 줄로 늘어선 채, 두 사람의 등 위에 깊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랜드 크로스가 한 별눈 거리에 있었다. 닫지 못한 채로 떠오르는 별의 속도가 사람이 닫는 속도를 추월하고 있었다.
KA가 황금 펜타곤의 다섯 문 중 하나, 가장 가까운 문 앞에 멎었다.
메르가 외투 안주머니에서 페트로나스 왕가의 비밀 지도를 꺼냈다. 지도가 펜타곤의 문 앞에서 가만히 따뜻해졌다. 지도가 문의 열쇠였다. 페트로나스 폭주족과 케이지의 본체가 같은 가락에 묶여 있다는 사실이, 지도의 따뜻함으로 또렷이 짚이고 있었다.
"…들어가자."
토르가 짧게 음운을 옮겼다.
"…응."
KA의 외피가 가만히 문 옆으로 다가갔다. 시현이 안쪽에서 가는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펜타곤 안쪽 어디에선가 한 본체가 눈꺼풀을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메르의 손목 안쪽 두 자국이 가만히 따끔거렸다. 검은 자국이 깊어졌고, 푸르빛 인장이 짧게 떨었다. 한 사람의 살갗 위에 두 세계의 표시가 동시에 깨어나고 있었다.
(13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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