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 유정충의 바다
다리의 끝이 바다에 닿는 자리에서 KA가 멈춰 섰다.
다리는 자갈도 흙도 아닌 두꺼운 강철로 짜여 있었다. 강철 위에 녹의 결이 두텁게 쌓였다가, 비를 맞고, 햇빛을 받고, 다시 녹이 깔리기를 수십 년 반복한 표면이었다. 페트로나스 사람들이 다리를 새로 짓지 않고 옛 다리를 그대로 두는 것은 게을러서가 아니었다. 녹이 깊어진 강철이 새 강철보다 짠 바다 바람에 더 잘 견딘다는 사실을, 그들은 한 세대를 들여 배웠다.
다리 너머 시야가 트였다. 바다였다. 그러나 부동항의 차가운 푸른빛 바다가 아니었다. 옅은 청록빛에 가까웠고, 수면 위로 길게 늘어진 강철 기둥들이 마치 거인의 손가락처럼 솟아 있었다. 도시였다. 바다 위에 세운 도시. 페트로나스. 강철 기둥마다 케이블이 그물처럼 엮여 있었고, 케이블 끝에서 옅은 노란 등불이 한 점씩 켜져 있었다. 어선의 등불이 부동항에서 옅게 흔들렸다면, 페트로나스의 등불은 강철 기둥에 박혀 흔들리지 않았다.
"…다리는 여기까지다."
KA의 음이 짧게 올라왔다.
"…바다 위로는 어떻게 가는데?"
메르가 물었다.
"…바다 위가 아니라 바다 아래로."
KA의 검은 외피가 가만히 변하기 시작했다. 검은 발이 안쪽으로 거두어졌고, 외피의 옆구리가 둥글게 부풀어 올랐다. 매끄럽게 닦인 갑각 형태로 변해 갔다. 옆면에 작고 둥근 창이 두 개 새로 만들어졌다. 창 너머로 바닷물이 비쳤다. 잠수정이었다. KA가 자기 형태를 빙판에서 잠수정으로 바꾸기까지 두 호흡이면 충분했다.
메르가 작게 입을 벌렸다. 학자였기에 더 놀랐다. 학부 시절 메르가 다룬 어떤 변형 알고리즘도 이만한 효율로 형태를 바꿀 수 없었다. 사람이 만든 도구가 행성의 도구를 따라잡으려면, 행성보다 한 세대를 더 살아야 했다.
"…올라타자."
토르가 짧게 말했다.
두 사람이 갑각 옆문으로 들어섰다. 안쪽이 둥글고 좁았다. 둥근 창 두 개가 옆에 나란히 있었고, 그 사이에 비익조가 자기 자리를 잡았다. 갑각이 부드럽게 물 아래로 내려갔다. 다리 옆 바닷속으로, 페트로나스 도시 아래쪽 깊은 곳을 향해. 둥근 창 너머로 물의 색이 점점 짙어졌다. 청록빛에서 짙은 푸른빛으로, 그 다음에 거의 검은빛으로.
"…산란지가 어디 있어?"
메르가 물었다.
"…더 깊은 곳. 빛이 안 닿는 곳. 사람이 만든 빛이 아니라 짐승이 만든 빛이 보이는 곳."
KA의 답이 둥근 갑각 안쪽 어딘가에서 가만히 흘러나왔다.
검은빛이 또 다른 색으로 풀려 가는 자리에서 두 사람은 처음으로 옅은 빛 알갱이를 보았다.
처음에는 한 점이었다. 다음에 두 점, 다섯 점, 열 점. 알갱이가 점점 늘어나, 갑각 옆을 따라 흐르듯 떠다녔다. 알갱이마다 옅은 노랑이 새벽 안개처럼 번져 있었다. 메르의 손가락이 둥근 창에 닿았다. 알갱이 하나가 창 옆을 따라 잠시 머물다 다시 무리로 돌아갔다.
유정충(有情蟲)이었다.
발광하는 작은 바다 짐승. 한 마리는 손톱보다 작았지만, 무리를 이루면 도시의 등불보다 환했다. 산란지 한가운데, 어둠 속에서 무리가 거대한 별자리처럼 둥글게 모여 있었다. 빛이 마치 사람이 깨어나기 직전의 가는 숨처럼, 알갱이 한 점씩 따로 들숨과 날숨을 가졌다.
갑각이 산란지 가장자리에 부드럽게 멎었다. 옆문이 열렸다. 두 사람이 머리를 옅게 숙이고 나왔다. 갑각 옆에 작은 해저 바위 한 덩이가 있었고, 그 바위 위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짙은 청록빛 잠수복. 머리를 짧게 자른 40대 여인. 한쪽 어깨에 옛 어부 가문의 작은 문장이 새겨진 가죽 패치. 손에 가는 작살 한 자루를 들고 있었지만, 들고 있는 자세가 무기로 든 자세가 아니었다. 짐승을 잡는 어부가 아니라, 짐승을 지키는 사람의 자세였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여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가락이 페트로나스의 빠른 어법이었다. 비익조가 옮겼다.
"…페트로나스 산란지의 잠수부예요. 이름은 누리."
페트로나스 산란지의 잠수부인 누리가 자기 이름을 건넸다.
"…메르."
"…토르."
누리의 시선이 잠시 토르에게 머물렀다. 호기심이라기보다는 옛 그림을 다시 보는 사람의 시선이었다.
"…어머니가 그림을 그려 두셨더라구요. 50년 전에. 가슴에 작은 구멍이 있는 청년이 메르의 어머니 옆에 함께 오실 거라고."
"…어머니께서요?"
"…누리의 어머니가 솔, 단, 이라, 한라와 같은 세대였어요. 누리는 그 분들의 다음 세대고요. 50년의 시간이 한 세대를 건너뛰니까, 어머니 이야기를 직접 듣지 못한 사람이 두 분께 안내자가 되는 일이 자연스럽지요."
메르가 가만히 누리를 보았다. 솔이 60대였고, 한라가 70대였고, 이라가 60대였다. 누리는 40대. 어머니가 50년 전에 두고 가신 부탁이, 한 세대를 건너 다음 세대의 어깨 위로 옮겨 가고 있었다. 한 부탁이 50년을 살아남는 것은 그 부탁을 받은 사람이 50년을 산 것이 아니라, 그 부탁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옮겨 다니며 50년을 산 것이었다.
"…유정충들이에요."
누리가 무리 쪽으로 작살을 살짝 기울였다. 알갱이 무리가 작살의 끝을 따라 잠시 움직였다.
"…아름답네요."
"…아름답기도 하고, 위태롭기도 해요. 별이 한 눈씩 새로 떠오를 때마다, 산란지가 한 결씩 옅어지고 있어요."
"…여기도요?"
"…빙하만이 별을 가장 먼저 받는 게 아니에요. 바다 깊은 곳도 같이 받아요. 빙하는 결을 한 줄로 깔아 두고, 바다는 빛을 한 점씩 잃어 가요. 두 가지 다 행성의 박물관이에요."
"…비목어를 불러야 하지요?"
누리가 물었다.
"…네."
"…부르시면, 두 가지가 풀입니다. 첫째, 첫 갈래의 둘째 자리가 닫혀요. 그러나 별은 아직 감기지 않아요. 둘째, 비목어와 유정충이 한 자리에서 만나면, 두 짐승이 본래 한 종이었다는 비밀이 풀려요."
"…한 종이요?"
"…양 세계의 짐승이 깊은 바다 어딘가에서 같은 한 종에서 갈라져 나왔어요. 비목어는 산해경의 한 마리지요. 유정충은 페트로나스의 한 무리고요. 그러나 두 짐승의 가락이 같아요."
메르가 가만히 토르를 보았다. 토르가 끄덕였다. 토르가 등에서 산해경의 해경 한 권을 꺼냈다. 잃어버린 첫 페이지를 메르가 외투 안주머니에서 꺼내 토르에게 건넸다. 토르가 페이지를 본문 사이에 끼웠다. 책 표지가 옅게 따뜻해졌다.
메르가 검은 막대를 산란지 바위 옆에 가만히 댔다. 막대 끝에서 일곱 가닥의 측량선이 한꺼번에 그어졌다. 일곱 가닥이 모두 산란지 한가운데 빛 알갱이 무리의 중심점에서 멎었다.
토르가 가슴 위에 한 손바닥을 가만히 댔다. 가슴 빛이 손바닥 너머로 흘러 책의 표지에 닿았다. 산해경 본문이 저절로 한 페이지로 열렸다. 그 페이지에 비목어 그림과 글이 떠올랐다.
"…같은 박자에."
메르가 작게 발음했다.
"…같은 박자에."
토르가 같은 음운을 옮겼다.
막대의 일곱 가닥과 토르의 가슴 빛이, 산란지 가운데 한 점에서 만났다. 만나는 순간 빛 알갱이 무리의 한가운데가 둥글게 흩어졌다 다시 모였다. 흩어진 자리에서 두 마리의 작은 물고기가 떠올랐다. 한 마리는 왼쪽에 한 눈, 다른 마리는 오른쪽에 한 눈. 두 마리가 옆으로 한 결로 붙어 있었다. 한 마리는 혼자 헤엄칠 수 없었다. 둘이 같은 박자에 같은 방향으로만 움직였다.
비목어였다.
두 마리의 비목어가 유정충 무리의 한가운데를 천천히 가로질렀다. 유정충들이 옆으로 비켜 길을 내주었다. 그러다가 비목어 두 마리의 두 눈이 한 알갱이 옆에 멎었을 때, 그 알갱이가 옅은 노랑이 아니라 깊은 푸르빛으로 바뀌었다. 유정충 한 마리가 비목어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두 짐승이 같은 한 자리에서 같은 본체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빛깔 한 가닥의 변화로 드러난 것이었다.
"…두 세계의 짐승이 같은 한 종이라는 거예요."
누리가 가만히 풀어 주었다.
"…두 행성이 깊은 바다 어딘가에서 본래 같은 한 자락에 묶여 있었다는 거고요. 사람들이 자기 행성이 따로 떨어진 줄 알지만, 어느 깊은 자리에서는 두 행성이 한 가락으로 묶여 있어요."
두 사람 모두 그 풀이가 자기 가슴 안쪽 어딘가에 한 줄로 가만히 깔리는 것을 느꼈다. 자기들이 서로 다른 세계에서 떨어진 두 사람이 아니라, 본래 같은 한 가락에서 갈라진 두 짐승이라는 사실이, 그 풀이로 한 결 또렷이 새겨졌다.
한 마리의 유정충이 무리에서 천천히 떠올라 메르의 손목 위에 가만히 내려앉았다. 알갱이가 살갗에 닿았다. 따끔하지 않았다. 옅게 따뜻해졌다. 알갱이가 한 점의 빛 인장으로 살갗 위에 새겨지고, 알갱이는 다시 무리로 돌아갔다.
메르의 손목 안쪽, 어제 검은 자국 옆에, 옅은 푸르빛 인장 하나가 새로 새겨져 있었다.
"…저 무리가 메르를 자기들 무리의 한 자락으로 받아들였다는 표시예요."
누리가 작게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고마운 건 누리가 아니라, 유정충들이에요. 옅은 푸르빛이 한 무리의 인사고요."
메르가 손목 안쪽 두 자국을 가만히 옷소매로 가렸다. 검은 자국 하나, 옅은 푸르빛 인장 하나. 자국이 한 가지씩 살갗에 늘어가고 있었다. 첫 자국이 비티움의 한 사절이 새긴 자국이었다면, 둘째 자국은 한 행성의 짐승 무리가 새긴 자국이었다. 한 사람의 살갗 위에 두 세계가 동시에 자기 표시를 새기고 있었다.
두 사람이 갑각 안으로 다시 올라탔다.
누리가 갑각 옆까지 따라와 작은 종이 한 장을 메르에게 건넸다.
"…페트로나스 도시 안으로 들어가시면, 인공섬 도시 E에서 한 가지 시험이 두 분을 기다려요. 매드맥스 풍이라는 말 들으셨을 거예요. 폭주족 천국이고요. 한 가지 정보를 얻으시려면 5km 드래그 레이싱에 출전하셔야 해요."
"…우승해야 정보를 줘요?"
메르가 물었다.
"…네. 우승 상품이 페트로나스 왕가의 비밀 지도예요. 그 지도가 가리키는 곳이 C국 아틀란타 케이지 깊은 곳, 황색 펜타곤이고요. 첫 갈래의 마지막 자리지요."
"…우승할 자신이 있을 만한 도구가 저희한테 있을까요?"
"…갑각의 변형 능력이 있잖아요. 갑각이 잠수정도 되고, 차량도 되고, 빙판 트랙도 돼요. 5km 정도면 충분히 돼요."
"…고맙습니다, 누리."
"…한 가지 더요."
누리가 갑각 창 옆으로 가까이 왔다.
"…페트로나스 인공섬에는 폭주족만 있는 게 아니에요. 비티움 사람들이 한 무리 잠입해 있어요. 검은 망토 사절들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의 모양을 한 사람들이요. 더 위험해요. 알아보시기 어려우니까요."
"…어떻게 알아보죠?"
"…메르의 손목 안쪽 검은 자국이 옅게 떨면, 그 자리에 한 사람이 있는 거예요."
메르가 자기 손목을 옷소매 너머로 가만히 짚어 봤다.
"…고맙습니다."
갑각이 부드럽게 산란지에서 떠올랐다. 옆 창 너머로 알갱이 무리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흩어졌다 모이며 인사를 건넸다. 누리의 잠수복 끝이 알갱이 사이로 옅게 멀어졌다.
갑각이 페트로나스 도시 쪽으로 천천히 떠올랐다. 둥근 창 너머로 짙은 푸르빛이 옅은 푸르빛으로, 그 다음에 청록빛으로, 마지막에 도시의 등불이 비치는 노란빛으로 바뀌었다.
하늘에 별 아홉 개가 한 줄로 늘어선 채, 두 사람의 등 위에 가만히 머물러 있었다. 한 자리도 아직 감기지 않았다. 첫 갈래의 두 자리가 닫혔고, 마지막 한 자리가 남아 있었다. 황색 펜타곤. C국 아틀란타 케이지 깊은 곳.
메르가 손목 안쪽 두 자국을 다시 한 번 짚어 보았다. 검은 자국이 옅게 따끔했다. 페트로나스 인공섬 어딘가에 비티움의 사람이 한 무리 자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갑각이 도시의 등불 무리 한가운데로 향했다.
(10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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