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 북방의 첫 새벽
펜타곤의 두 번째 문이 가만히 열렸다.
문 너머에서 짙은 청색의 빛이 새어 나왔다. 부동항의 차가운 푸르빛도, 페트로나스 산란지의 깊은 푸르빛도 아니었다. 그 두 빛보다 한층 더 묵직한 청색이었다. 빛의 가운데에 검정이 가만히 섞여 있어, 보는 사람의 가슴 안쪽으로 한 가닥씩 가라앉는 빛이었다.
KA가 그 빛 안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갔다.
문의 안쪽이 회랑이 아니었다. 회랑이 끝난 자리에서 풍경이 단번에 트였다. 바깥이었다. 펜타곤 안의 회랑을 지나 다시 바깥에 나왔다는 사실이, 메르와 토르 둘 다 한 호흡 늦게 알아챘다. 두 갈래 사이의 이동이 케이지 도시 안에서 끝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한 갈래의 마지막 문이 다른 갈래의 첫 풍경으로 직접 이어져 있었다.
바깥은 바다였다. 그러나 부동항의 바다도, 페트로나스의 바다도 아니었다. 짙은 청색의 바다가 사방으로 펼쳐져 있었고, 그 바다 위로 가는 안개가 두껍게 깔려 있었다. 안개의 너머에서 옅은 새벽 빛이 한 줄기 새어 나왔다. 해가 떠오르는 것도, 해가 지는 것도 아닌 새벽 빛이었다. 북방의 새벽이 그렇게 깊다고, 토르는 마을 큰어른께 어릴 적 한 번 들은 적이 있었다. 북방의 한 해 절반이 새벽이고, 다른 절반이 해질녘이라고. 한낮이 없는 곳이라고.
바다 한가운데에 섬이 있었다.
섬은 검은 현무암으로 짜인 화산섬이었다. 가운데에 사람 키 백 배쯤 되는 화산이 솟아 있었고, 화산의 옆구리에서 가는 김이 한 줄씩 새어 나왔다. 잠든 화산이었지만, 잠든 채로 호흡하는 화산이었다. 사람과 닮은 결의 화산. 사람도 그렇게 잠든 채로 호흡한다. 사람의 잠이 사람의 활동을 멎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가장 깊은 안쪽을 흐르게 하는 일이라는 사실. 화산도 그러했다.
섬의 가장자리, 절벽의 끝에 등대 하나가 가만히 서 있었다.
KA가 섬의 부두에 천천히 닿았다.
부두라기보다는 검은 현무암이 자연스럽게 절벽 옆으로 내려와 만든 가는 자갈밭이었다. 그 자갈밭에 작은 어선 두 척이 매여 있었다. 어선의 옷이 짙은 청색이었다. 부동항의 어선과 다른 결이었다. 더 오래 닳아 있었고, 더 깊은 흔적이 옆구리에 새겨져 있었다.
메르와 토르가 KA에서 내렸다. KA의 외피 안쪽에서 현우가 가만히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시현은 영영 잠든 채로 외피의 깊은 안쪽에 안치되어 있었다. 비익조가 메르의 어깨 위에 옮겨 앉았다.
절벽의 위쪽 등대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내려왔다.
60대로 보이는 여인이었다. 짙은 청색의 두꺼운 외투를 두르고, 머리에 흰 천을 단정히 감았다. 양손에 가는 가죽 장갑. 발걸음이 가만히 가벼웠다. 한 평생 자갈밭을 오르내린 사람의 발걸음이었다. 절벽의 자갈 한 알마다 자기 발이 어디에 닿아야 하는지를 몸이 먼저 아는 사람.
"오랜만이에요."
여인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음운이 옛 한국어와 닮은 가락이었다. 비익조가 옮길 필요가 없었다.
"저희를 아세요?"
메르가 물었다.
"두 분 어머님이 50년 전에 이 등대에 다녀가셨어요. 그때 어린 저에게 두 분의 도착을 미리 일러 두고 가셨고요. 영서라고 해요. 영원한 새벽이라는 뜻이지요."
북방 등대지기인 영서가 자기 이름을 건넸다.
"메르입니다."
"토르."
영서의 시선이 토르의 가슴 구멍에 잠시 머물렀다. 사람들 대부분이 토르의 가슴을 처음 볼 때 한 호흡 멈추는데, 영서는 멈추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옛부터 알고 있는 사람을 다시 만난 인사였다.
"흰빛이 한 가닥 새로 흐르네요. 검은빛도 한 가닥 같이 흐르고요. 한 분의 본체와 가락이 묶여 다시 풀려 가는 모양이에요."
"현우 분 덕분이에요."
토르가 짧게 답했다. 영서가 가만히 끄덕였다. 현우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은 적 있는 사람의 끄덕임이었다.
"올라오세요. 등대에서 차 한 잔 드릴게요. 두 분이 둘째 갈래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풀어 드릴 사람이 저예요."
등대 안쪽은 좁고 따뜻했다.
두꺼운 돌벽이 한 평생의 추위를 막아 주었고, 가운데에 작은 화로 하나, 화로 옆에 옛 의자 두 개, 의자 옆에 가는 책꽂이. 책꽂이 위에 두꺼운 책 한 권이 가만히 놓여 있었다. 한라의 빙하지와 닮은 결의 책이었다. 표지에 한자 두 자가 옅게 새겨져 있었다. 화산지(火山志).
영서가 화로 위에서 차를 데웠다. 검은 차였다. 마시기 전부터 따뜻한 김이 가는 가닥으로 올라왔다. 두 사람의 손이 가만히 풀어졌다. 케이지의 황금 펜타곤에서부터 굳어 있던 긴장이 차 한 잔에 가만히 흘러내렸다.
"둘째 갈래의 풀이를 시작할게요."
영서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첫 갈래는 본체에 관한 갈래였어요. 사람의 모양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풀어내는 갈래. 둘째 갈래는 다른 결이에요. 사람의 시간에 관한 갈래입니다."
"시간이요?"
메르가 물었다.
"네. 시현 분이 11화 다리 위에서 두 분께 짧게 풀어 주셨지요. 자기 안쪽의 시간이 자기 바깥쪽의 시간과 다른 박자로 흐른다고요. 그 풀이가 둘째 갈래의 첫 단서예요."
토르가 가만히 끄덕였다. 시현이 음절을 길게 늘여 말하던 가락이 그 풀이의 모양이었다.
"이 화산섬이 그 풀이의 첫 거점이에요. 화산 안쪽의 시간이 화산 바깥쪽의 시간과 다른 박자로 흐릅니다. 화산 안쪽에서는 한 시간이 바깥의 한 달에 해당해요. 화산이 잠들어 호흡하는 동안, 그 안쪽에서 시간이 옅게 느려져 있어요."
"우리 어머니가 50년 동안 살아 계실 수 있었던 이유가요?"
메르가 짧게 물었다. 자기 가슴 안쪽에서 5화 한라가 풀어 주었던 두 가락의 시간이 다시 짚였다.
"맞아요. 그 분이 시간이 느린 영역으로 옮겨 가셨기 때문에 50년을 버티신 거예요. 비티움 호수 안의 도시가 시간이 가장 느린 영역이고요. 그 분 본체가 잠시 잠들었다 깨어났다 하는 박자도, 본체 자신의 시간이 바깥의 시간과 다르게 흘러서 가능한 거예요."
메르가 화로의 불빛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불빛이 가는 호흡으로 켜졌다 꺼졌다 했다. 사람의 호흡과 닮은 결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호흡보다 박자가 한 호흡 느린 결.
"둘째 갈래에서 두 분이 닫으셔야 할 자리가 셋입니다. 첫째가 이 화산섬. 둘째가 북방 빙원 아래의 옛 도시. 셋째가 둘째 갈래의 마지막 거점, 짙은 청색의 광산이에요."
"이 화산섬에서 무엇을 해요?"
토르가 물었다.
"화산 안쪽에 잠든 한 사람이 있어요. 옛 시간을 지키는 사람. 그 분을 깨우셔야 해요. 깨우시면 그 분이 두 분께 시간의 결을 풀어 주시고, 다른 두 자리를 닫을 열쇠를 건네 주세요."
"잠든 분이 누구신가요?"
메르가 가만히 물었다.
영서가 차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화산지의 표지에 가만히 손바닥을 댔다.
"옛 시간의 학자. 이름은 단오. 50년 전 메르 양 어머님과 함께 화산 안쪽에 시간의 결을 새겨 두신 분이에요. 그 분이 시간의 결을 지키느라 50년 동안 잠들어 계셨고요."
"또 한 분이 어머니 때문에 잠들어 계신 거네요."
메르가 작게 음운을 옮겼다. 자기 어머니가 50년 전 한 행성의 여러 자리에 자기 가닥을 묻어 두셨다는 사실이, 한 자리씩 풀이될 때마다 새로 짚이고 있었다. 어머니가 미루고 가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머니의 의식이 한 평생을 이 행성의 가는 자락에 한 가닥씩 새기는 의식이었다.
영서가 화로 옆에 놓인 작은 가죽 주머니를 가만히 메르 쪽으로 옮겼다.
"화산 안쪽으로 들어가시는 길에 이걸 가지고 가세요. 옛 등대의 가는 불씨예요. 화산 안쪽이 어둡습니다. 사람의 등불은 그 어둠 안에서 한 호흡도 못 견디고요. 이 불씨만 그 안에서 흐려지지 않아요."
메르가 주머니를 받아 외투 안주머니에 넣었다. 어머니 사진, 검은 막대, 한라의 종이, 비티움 좌표 지도, 잃어버린 산해경 첫 페이지, 자줏빛 통행증, 회색 통행증, 페트로나스 비밀 지도. 그 옆에 옛 등대의 불씨 한 주머니가 새로 자리잡았다. 메르의 안주머니가 한 가닥씩 새 짐을 받아 들이고 있었다.
"한 가지 더 알려 드릴 게 있어요."
영서가 차를 마저 마시고 자리에서 가만히 일어났다.
"비티움이 둘째 갈래에서 두 분께 보내는 자가 검은 망토 사절이 아니에요. 8색 거인도 아니고요. 다른 사람이 옵니다."
"누구요?"
메르가 물었다.
"두 분과 가락이 비슷한 사람. 두 분 옆에서 같은 박자로 호흡할 수 있는 사람. 두 분이 친구로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사람."
토르의 가슴이 가만히 가라앉았다. 노철이 8화 끝에서 풀어 준 비티움의 작동 방식이 다시 짚였다. 두 사람 사이를 끊으려는 가닥이 두 사람이 같이 하면 할수록 깊어진다는 한 마디. 그 가닥이 둘째 갈래에서 친구의 모양으로 두 사람 앞에 나타날 것이었다.
"어떻게 알아봐요?"
메르가 물었다.
"손목 자국이 떨지 않아요. 비티움의 사람인데도 검은 자국이 가만히 머물러 있을 거예요. 그래서 알아보기 더 어렵고요."
"그러면 어떻게 알아봐요?"
"그 사람이 자기 그림자를 옅게 새깁니다. 사람의 그림자는 두 발 아래에 한 가닥으로 깔리는데, 그 사람의 그림자는 가는 결로 두 가닥이 깔려요. 두 가닥이 한 가닥보다 옅게요. 한 번 보시면 알아보실 수 있을 거예요."
메르가 가만히 끄덕였다. 자기 손목 자국이 알려주지 않는 사람을 알아보는 방법이 그림자의 가닥 수라는 사실. 한 사람의 가장 평범한 그림자가 사람의 가장 깊은 사실을 드러낸다는 풀이. 사람이 자기를 가장 숨기고 싶을 때 가장 평범하게 행동하는 일이, 사람을 알아보는 가장 단순한 단서가 된다는 사실.
두 사람이 영서에게 짧게 인사를 건넸다. 영서가 등대의 출입구까지 따라 나와 두 사람을 배웅했다. 절벽의 자갈밭에서 KA가 가만히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두 옆 어선 두 척이 자기 자리에 그대로 매여 있었다.
화산섬의 안쪽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절벽의 반대편에 있다고 영서가 일러 주었다. 검은 현무암의 가는 갈라진 자리. 화산이 자기 호흡을 안쪽으로 거두는 자리. 그 자리에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한 입구가 가만히 열려 있었다.
하늘에 별 열 개가 줄로 늘어선 채, 두 사람의 등 위에 가만히 머물러 있었다. 첫 갈래에서 닫은 한 별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 빈자리가 둘째 갈래에서 닫을 다음 별의 자리이기도 했다. 한 별이 닫히면 다음 별이 그 닫힌 자리로 가만히 옮겨 가는 흐름이, 행성의 하늘에 새로 깔리고 있었다.
KA가 절벽의 반대편, 화산섬 안쪽 입구 쪽으로 미끄러졌다.
옛 등대의 불씨가 메르의 외투 안주머니에서 가만히 따뜻해졌다.
(16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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