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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학자의 본질/지리소설 the 천하도

the 천하도 - 제5화 시대의 필드

by 덕지덕지 2026. 5. 6.

THE 천하도

第五話 ▸ 시대의 필드

시대가 우리를 흘러가고, 우리는 시대를 머물게 한다.

엘스의 거처는 향정숲의 한가운데에서 한 시간 정도를 더 들어간 곳에 있었다.

슬라임 주머니의 작은 창문을 통해 보이는 풍경은 시간이 갈수록 더 빽빽해졌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잎사귀들이 빼곡하게 머리 위를 덮었다. 어딘가에서 작은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평소 듣지 못하던 음정의 노래.

"…우리 마을이 보여, 슬라임씨."

엘스의 한 마디에 작은 창문 바깥 풍경이 또 한 번 바뀌었다. 머리 위를 빽빽이 덮었던 잎사귀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사라지고, 한 번에 푸른 하늘이 시야에 들어왔다.

눈을 새로 뜬 태양이 그 푸른 하늘 한가운데에서 부드러운 햇살을 흩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햇살 아래로, 한 작은 마을이 펼쳐져 있었다.

하프와일드라이프 마을

집들은 대부분이 나무로 지어져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통나무집과는 묘하게 달랐다. 살아 있는 나무를 그대로 휘어서 집의 골조를 만든 듯한 모양이었다. 한 그루의 키 큰 나무가 자기 가지를 둥글게 휘어서 한 채의 집을 감싸 안고 있는 그런 형태.

집들 사이의 길에는 풀이 자라 있었다. 일반적인 잘 다듬어진 길이 아니라, 풀이 자기 마음대로 자라난 그 위에 사람들이 천천히 발자국을 만들어 가는 그런 길.

길 위로는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사람의 모양을 한 사람들이지만, 한 사람씩 보면 어딘가가 분명히 사람과는 달랐다. 어떤 사람은 머리에 작은 사슴 뿔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등 뒤에 새의 꼬리 깃털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어떤 사람은 발이 사람의 발이 아니라 짐승의 발이었다.

하프와일드라이프(Half-wildlife).

엘스가 어제 자기 종족의 이름을 그렇게 알려주었다. 사람의 모습에 동물의 일부 특성을 가진 종족. 「반인반수」라는 옛 말에 가장 가까운 그런 사람들.

그들이 지나가다가 엘스를 알아보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엘스는 자기 망토 자락 안에 매달린 슬라임 주머니를 한 손으로 살며시 가리며 인사를 받았다. '…나를 숨기고 있구나, 그녀.' 엘스의 그 작은 동작이 묘하게 마음에 와 닿았다.

왜 숨길까. 슬라임이 이 마을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무엇인가일까. 아니면 「800년 동안 기다려온 사람」이라는 그 단어가 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너무 무거운 것일까.

엘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슬라임 주머니가 그녀의 옆구리에서 작은 흔들림에 따라 가볍게 출렁였다.

엘스의 집

엘스의 집은 마을의 가장자리에, 다른 집들과 살짝 떨어진 자리에 있었다. 한 그루의 거대한 키가 큰 나무가 자기 줄기 한쪽을 비스듬히 굽혀서, 그 굽혀진 부분이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동굴 같은 공간을 만들고 있었다. 그 동굴 입구에 헝겊으로 만든 가벼운 문이 한 장 늘어뜨려져 있었다.

엘스가 한 손으로 헝겊 문을 옆으로 살짝 걷어내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쪽은 의외로 넓었다. 키 큰 나무의 줄기 안쪽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둥근 공간. 천장에서 한 줄기의 햇살이 작은 구멍을 통해 안쪽까지 떨어져 내렸다. 그 햇살 아래에 작은 책상과 의자, 그리고 한 켠에 깔린 침구가 있었다.

"여기가 우리 집이야. 마음껏 둘러봐."

엘스가 슬라임 주머니의 입구를 활짝 벌려서, 책상 옆의 풀잎으로 만든 카펫 위로 슬라임 몸을 내려놓았다. 슬라임의 몸이 풀잎 위에서 살짝 출렁였다가 천천히 안정 자세를 잡았다.

'…편안하다.'

슬라임의 몸 전체가 한 번에 한 번 부르르 떨었다. 마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처럼.

엘스가 그 슬라임 떨림을 보고 살짝 미소 지었다.

"…편안하지? 슬라임 종족은 풀잎 위에 올라가면 가장 편안하대. 풀잎 카펫은 일부러 너를 위해서 깔아둔 거야."

…그러고 보니, 엘스가 어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모든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슬라임이 된 나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하는지, 어떻게 들고 다녀야 하는지, 어떻게 편안하게 만들어줘야 하는지. 그녀는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마치 슬라임이 어떻게 사람의 모습에서 일시적으로 슬라임이 되었다가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는지 까지 알고 있는 사람처럼.

눈감는 태양의 메커니즘

엘스가 자기 의자에 앉아서, 무릎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자기 종족의 「상식」을 슬라임 손님에게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이 세계에서는 시간이 우리가 알던 그런 식으로 흐르지 않아."

엘스가 한 손으로 자기 작은 책상 위의 작은 모래시계를 하나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 모래시계는 일반적인 모래시계와는 다르게 모래 알갱이가 가운데에서 멈춰 있었다.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떨어지는 모래도 없었고, 아래쪽에 쌓인 모래도 없었다. 모든 알갱이가 가운데의 좁은 통로에 걸려 있는 채로 멈춰 있었다.

"…이게 「향정숲」의 시간이야. 우리가 「필드」 안에 있을 때는 시간이 이렇게 멈춰 있어. 모래가 떨어지지도 않고, 쌓이지도 않고."

엘스가 모래시계를 한 번 위아래로 흔들었다. 모래는 출렁이지도 않은 채로 그 자리에 머물렀다. 마치 액체가 아니라 고체가 갇힌 듯한 모양으로.

"그런데 「태양이 눈을 감을 때」 시간이 한 번에 풀려나. 그 1분 또는 5분 동안 모래 알갱이들이 한 번에 다 떨어지고 새로운 알갱이들이 위쪽에 다시 차여. 그리고 「어떤 알갱이」가 위쪽에 차이는지에 따라 우리 영역의 「시대」가 결정돼."

엘스의 한 손이 모래시계를 책상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다른 한 손으로 자기 책상 서랍에서 작은 그림책을 한 권 꺼냈다.

그림책의 첫 페이지에는 어제 보았던 9중 동심원의 천하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부주산이, 그 바깥 동심원에 차례차례 「내해」, 「외륜」, 「외해」, 「이외」, 「삼경」, 「사허」, 「오극」, 그리고 가장 바깥에 검은 「무(無)」가.

엘스가 외륜의 한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우리가 있는 곳은 외륜의 동쪽 끄트머리. 외해와 외륜이 만나는 좁은 띠. 이 띠가 「향정」이라고 불려. 향정해는 그 띠의 바다 쪽이고, 향정숲은 그 띠의 육지 쪽이야."

…향정.

우리 학교의 이름. 향정고등학교의 향정. 그것이 천하도 외륜의 동쪽 끝의 한 좁은 띠를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가짜로 만들어진 학교 이름이 아니었다. 적어도 800년 어쩌면 더 오래 전부터, 이 천하도의 한 영역의 이름이었다.

우리 학교가 1830년에 세워질 때, 누군가가 이 향정 영역과 연결된 위치에 학교를 세운 것이다.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의도된 좌표 일치. 그것이 책 「향정보통학교이백년신화사」에서 말한 「봉인의 외측 좌표」 일까.

엘스가 페이지를 한 장 더 넘겼다. 두 번째 페이지에는 같은 천하도가 그려져 있었지만, 한 가지가 달랐다. 천하도 위쪽 하늘에 거대한 눈동자가 그려져 있었다. 눈을 뜬 모습.

"태양이 눈을 뜨고 있을 때는 우리 영역의 시대가 정해져 있어. 한 시대가 시작되면 그 시대가 끝날 때까지 그 시대 안에서 살아. 짧으면 며칠, 길면 몇 달. 어쩌면 몇 년."

"하지만 태양이 눈을 감을 때마다 모래시계가 한 번 굴러가. 그러면 새로운 시대가 시작돼. 우리는 어떤 시대로 갈지 미리 알 수 없어. 그저 태양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어느 시대인지 보는 거야."

엘스가 페이지를 또 한 장 넘겼다. 세 번째 페이지에는 작은 둥근 점들이 천하도 위에 흩어져 그려져 있었다.

"이 작은 점들이 「필드」야. 필드 안에 있는 동안에는 시대 변화의 영향을 받지 않아. 외부에서 태양이 눈을 감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어도 필드 안의 사람들은 자기 시대 그대로 살아갈 수 있어."

엘스가 한 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외륜의 동쪽 끝, 향정 영역의 안쪽에 작은 점이 그려져 있었다. 그 점의 위치는 묘하게도, 어제 슬라임 몸 안에서 깨어난 그 빈터의 위치와 일치했다.

"우리 마을은 향정 영역의 「필드」 안에 있어. 그래서 우리는 시대 변화의 영향을 받지 않고 한 시대를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어. 너도 이 필드 안에 있으니까 안전해. 슬라임씨."

엘스의 식사

엘스가 그림책을 책상 위에 살짝 덮어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집의 한쪽 모서리에 있는 작은 화덕 앞으로 걸어갔다. 화덕에서는 작은 불꽃이 살짝 너울거리고 있었다.

엘스가 화덕 옆의 솥을 한 번 열어 보았다. 김이 한 번에 솟아올랐다. 그 김 사이로 묘한 향이 풍겼다. 사람의 음식의 향이 아니라, 풀과 꽃의 향이 섞인 그런 향.

"우리는 식물 위주로 먹어. 향정숲에서 자라는 모든 풀과 꽃과 열매가 우리의 식량이야. 슬라임씨는 무엇을 먹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같은 것을 먹어 보자."

엘스가 두 개의 작은 그릇에 솥의 내용물을 한 국자씩 떠서 담았다. 한 그릇은 자기 책상 위에, 다른 한 그릇은 슬라임 옆의 풀잎 카펫 위에 놓았다.

슬라임의 몸이 그릇 쪽으로 천천히 굴러갔다. 슬라임에게는 입이 없다.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한참을 그릇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데, 엘스가 살짝 미소 지으면서 한 마디를 건넸다.

"…그릇 위에 그냥 몸을 올려 봐. 슬라임은 몸 전체가 입이거든. 흡수해서 먹어."

…그렇구나. 그릇 위에 슬라임의 몸을 살며시 올렸다. 그릇 안의 따뜻한 국물이 슬라임의 아래쪽 면을 통해 천천히 흡수되기 시작했다. 흡수된 국물의 따뜻함이 슬라임의 몸 전체로 퍼져 갔다. 마치 작은 햇살이 안쪽에서부터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따뜻하다. 그리고 맛있다. 정말로 맛있다.'

사람의 미각으로는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맛이었다. 그러나 슬라임의 「몸 전체로 느끼는 맛」으로는 분명히 맛있다고 표현할 수 있는 그런 맛이었다. 입이 없는데도 미각이 있었다. 어쩌면 슬라임의 「먹는다」는 행위는 사람의 「숨을 쉰다」는 행위와 비슷한 것일지도 모른다. 몸 전체가 한 번에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그런 행위.

엘스도 자기 그릇의 음식을 천천히 한 숟가락씩 떠서 먹고 있었다. 사람의 음식을 먹는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사용하는 숟가락이 묘하게도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었다는 정도.

한참을 둘이서 조용히 식사를 한 후, 엘스가 자기 숟가락을 그릇 옆에 살짝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슬라임 쪽을 바라보면서 자기 강아지 귀를 한 손으로 살짝 만지작거렸다.

엘스의 시선

엘스가 처음으로 진지한 표정으로 슬라임의 노란 마블링 몸 전체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어제까지의 가벼움이 사라지고, 깊은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

"…슬라임씨. 너는 진짜로 어디서 온 거야?"

대답하고 싶었다. 그러나 슬라임의 입에서는 「뿌루룽」 진동음만이 흘러나왔다. 엘스도 그것을 알았는지, 자기 입가에 쓴 미소를 지었다.

"…미안. 너는 아직 말을 못 하지. 자기 명명을 마쳐야 비로소 사람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게 돼."

엘스가 한 번 호흡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한 마디를 흘렸다.

"…너는 우리가 800년 동안 기다려온 사람이야. 그것 하나만은 분명해."

엘스의 한 마디가 슬라임의 작은 몸 안에서 큰 진동을 만들었다. 노란 마블링의 표면이 한 번 부르르 떨었다.

"…우리 종족 안에는 옛날부터 한 가지 전설이 있어. 「800년 후에 한 명의 인간이 향정숲의 A002 빈터에서 깨어날 것이다. 그 사람이 우리 세계의 봉인을 다시 단단히 묶어줄 것이다」 라는 전설."

"800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어. 우리 세계의 「봉인」에 큰 균열이 생겼고, 그 균열을 막기 위해서 한 명의 핵심이 다른 차원으로 보내졌어. 그 핵심이 800년 후에 다시 돌아온다는 그런 이야기. 어른들은 한 세대씩 물려받으면서 매일 그 A002 빈터를 지켜왔어. 800년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엘스의 한 손이 슬라임의 몸 위에 살며시 얹혔다. 그녀의 손바닥이 슬라임의 몸 위에서 따뜻했다.

"…그 핵심이 너인 거 같아, 슬라임씨.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어보면 정확히 대답할 수가 없어. 다만 너의 색깔이. 너의 노란 마블링이. 우리 종족의 어른들이 800년 동안 기다린 「색」 이거든."

엘스가 한 호흡을 더 가다듬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묘하게 흔들렸다.

"…나는 그저 마을의 한 어린 하프와일드라이프야. 어른들의 그런 큰 이야기는 잘 모르고. 나에게는 그저 너는 한 마리의 슬라임씨일 뿐이야.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마, 천천히 가자. 우리에게는 시간이 충분해."

엘스의 한 마디가 묘하게 마음에 와 닿았다.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마」. 800년 동안 기다려온 사람이라는 그 무게를 한 번에 떠안기에는, 17세의 한 학생의 어깨가 너무 좁다는 것을 그녀는 알아주었다.

밤의 작은 대화

엘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집의 한 켠에 깔린 침구를 펼쳤다. 침구는 풀잎과 꽃잎으로 만들어진 부드러운 것이었다. 향나무 향기가 침구 안쪽에서 살짝 풍겨 나왔다.

"오늘 밤은 여기서 자. 슬라임은 몸 전체가 흡수 기관이라 풀잎 위에 그냥 누우면 잠을 잘 잘 수 있어. 나도 옆에서 자고 내일 자기 명명 의식을 도와줄게."

슬라임의 몸을 침구 위에 살며시 올렸다. 풀잎과 꽃잎의 부드러움이 슬라임의 몸 아래에서 묘하게 안정적이었다.

엘스가 자기도 침구의 다른 한 켠에 누웠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묘하게 가까웠다. 슬라임의 몸이 작아서 사람과 가까이 누워야만 같은 침구 안에 머물 수 있었다.

엘스의 강아지 귀가 슬라임의 몸 옆에서 가볍게 흔들렸다. 그녀의 눈은 살짝 감겼고, 호흡이 천천히 깊어져 갔다.

"…슬라임씨, 너는 잠을 잘 수 있어?"

엘스가 거의 잠든 목소리로 한 마디를 흘렸다. 그녀의 한 손이 슬라임의 몸 옆에 살며시 닿았다. 손바닥이 슬라임의 표면에 가볍게 얹혔다.

슬라임의 몸이 한 번 부드럽게 진동했다. 「뿌루루」가 흘러나왔다. 그것이 「예」라는 의미인지 「아니요」라는 의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엘스는 그 진동음을 들으면서 살짝 미소 지었다.

"…내일 너에게 이름을 줄 거야. 「자기 명명」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이름을 주는 의식이야. 너는 너 자신을 어떻게 부르고 싶은지 자기에게 물어봐. 가장 너답게 너를 부를 수 있는 이름을. 그러면 라이트서클이 너에게 그 이름을 박아줄 거야. 그게 이 세계에서 자기 정체성을 만드는 방식이야."

엘스가 한 호흡을 더 깊게 들이마셨다. 그녀의 손이 슬라임의 표면 위에서 살짝 따뜻했다.

"…그리고 자기 명명이 끝나면, 너는 사람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어. 그 모습은 어제까지의 너와 같지 않을 수도 있어. 너의 마음 깊은 곳에서 가장 너답다고 느끼는 그 모습으로 돌아오게 되니까. 그게 이 세계에서의 너의 새로운 시작이야."

엘스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 갔다. 그녀가 잠에 빠져 가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지막 한 마디는 분명히 들렸다.

"…잘자, 슬라임씨.
내일은 너에게 다른 이름이 생기는 날이야.
…기대돼."

엘스가 잠에 빠졌다. 그녀의 호흡이 평온해져 갔다. 강아지 귀가 잠든 상태에서도 가끔씩 가볍게 움찔거렸다. 어떤 작은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슬라임의 몸 옆에서 그녀의 한 손이 따뜻하게 닿아 있었다. 손가락 끝이 슬라임의 노란 마블링 표면에 살며시 얹혀 있었다. 잠에 빠진 그녀가 손을 내려놓으려는 의지조차 없는 것처럼.

슬라임의 몸 안에서, 어제까지의 학생 하천강이 천천히 머릿속을 정리해 갔다.

'…나는 800년 동안 기다려진 사람이래. 「봉인」을 다시 단단히 묶기 위해 다른 차원으로 보내졌던 핵심이 돌아온 거래.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도서관 A002 서가의 사라짐도, 「향정보통학교이백년신화사」 책의 마지막 페이지의 빨간 점도, 사서교사 경환 선생님의 메모도, 그리고 어둠 속의 묵직한 목소리들도 모두 한 줄로 이어지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한 자락에서 한 명의 강아지 귀의 소녀가 800년 동안 나를 기다려 왔다. 그녀의 종족 전체가. 매일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그 무게는 무거웠다. 그러나 엘스의 손이 슬라임의 몸 옆에서 따뜻한 동안에는 그 무게가 그렇게 견딜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슬라임의 노란 마블링이 한 번 가볍게 빛났다. 마치 안쪽에서부터 작은 별이 한 개 깜빡인 듯한 그런 빛.

집 천장의 작은 구멍을 통해 새로운 시대의 푸르스름한 별빛이 안쪽까지 흘러 들어왔다. 그 별빛 아래에서, 한 명의 강아지 귀의 소녀와 한 마리의 노란 마블링의 슬라임이 풀잎의 침구 위에서 나란히 잠들어 갔다.

800년 만의 첫 밤이었다.

— 第五話 끝 —

▸ 第六話 「다섯 빛의 선택」으로 이어집니다.

▣ 작가 노트

"필드(field)" 개념은 본 작품에서 시간의 무작위 변환 영향을 받지 않는 안전 영역을 가리킵니다. 천하도 위에 점점이 흩어진 필드들은 시대 변화를 견디는 「방주」와 같은 곳이며, 향정숲은 외륜의 동쪽 끝에 위치한 가장 큰 필드 중 하나입니다. 「자기 명명(自己命名)」은 본 작품에서 종족이 하이레벨로 진화하기 위한 입구가 되는 의식으로, 이름을 가진다는 것이 곧 정체성을 가진다는 동양적 관념을 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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