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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학자의 본질/지리소설 the 천하도

the 천하도 - 제4화 향정숲의 슬라임

by 덕지덕지 2026. 5. 6.

THE 천하도

第四話 ▸ 향정숲의 슬라임

시대가 한 번 바뀌고,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었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정확히는 눈꺼풀이라고 부를 만한 무엇인가가 있는지조차 잘 모르겠다.

눈을 뜨려고 했는데, 시야가 열리는 방식이 어딘가 어색했다. 마치 셔터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안개가 바깥쪽으로 천천히 흩어져 가는 그런 식의 시야 확보.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

"…일어났구나, 슬라임씨."

위쪽 어딘가에서 청량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리. 어제 아니, 어제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야광석 가득한 해변에서 만난, 그 강아지 귀의 소녀. 엘스.

눈이 점점 또렷해졌다. 시야 가운데에 호기심 어린 눈동자 두 개가 가득히 들어왔다.

엘스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그녀는 무릎을 꿇은 자세로, 두 손을 모아 턱을 받친 채, 나를 정말 가까이서 들여다보고 있었다.

"…우와. 진짜 살아 있네. 어제는 진짜로 죽은 줄 알았어. 너무 안 움직여서."

"…저, 저기…"

목소리를 내려고 했는데, 입에서 나간 것은 사람의 말 이라기보다는 물풍선이 살짝 새는 것 같은 그런 둔탁한 진동음이었다.

"…뿌, 뿌루루루…"

엘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하고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미안. 웃으면 안 되는데. 진짜 웃으면 안 되는데."

웃으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엘스는 자기 입가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웃음을 한참 참고 있었다.

슬라임의 몸

상황이 이상했다. 분명히 어제 야광석 해변에서 엘스의 손에 이끌려 한 발짝을 내디뎠는데. 그 다음 기억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한 발짝을 내디딘 직후 시야가 한 번에 까매졌고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는 여기였다.

「여기」가 어디인지부터 살펴보아야 했다. 시선을 천천히 옆으로 그리고 위로 움직였다. 그런데 시선이 움직이는 방식조차 묘했다. 머리를 돌리는 게 아니라 시야 자체가 액체처럼 한쪽으로 출렁이는 그런 느낌이었다.

시야 가장자리에 내 「몸」이 보였다.

아니. 「몸」이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사람의 형체로서의 몸이 없었다. 어깨도, 팔도, 손도, 다리도, 발도 익숙한 그 위치에 없었다. 대신 시야 가장자리에 반투명한 둥글고 살짝 출렁거리는 젤리 같은 무엇인가가 있었다.

"…뿌, 뿌릉……"

"아, 말 못 해? 슬라임은 보통 말 잘 하는데. 너 진짜 신생 슬라임인가 봐."

엘스가 무릎으로 한 발짝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 짧은 거리에 자그마한 풀잎 몇 개가 그녀의 무릎 아래에 깔렸다. 풀잎은 어딘가 익숙한 향기를 풍겼다.

"으응? 너, 옷을 입고 있었네. 어제 어두워서 잘 안 보였는데."

엘스의 시선이 내 몸의 「위쪽」에 머물렀다. 시선이 머문 그 자리에 분명히 어제까지 내가 입고 있던 향정고 교복의 일부분이 슬라임 몸 안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이건 좀 처음 보는 슬라임이네. 옷을 같이 가지고 있는 슬라임은. 보통은 환골탈태할 때 옷이 다 흩어져 버리는데."

엘스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한 손을 내 슬라임 몸 위에 살짝 얹었다. 그녀의 손이 닿은 부위가 살짝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천천히 다시 원래 모양으로 부풀어 올랐다.

'…따뜻하네. 사람의 손은 슬라임의 몸 안에서도 따뜻하게 느껴지는구나.'

엘스가 손을 떼면서, 묘하게 즐거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너, 「하이슬라임족」 같은데."

하이슬라임족. 그게 뭔지는 모른다. 그러나 어제 처음 만났을 때도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진짜 하이슬라임은 아닌 것 같다」고. 하이슬라임이 아니면서 슬라임의 형태를 한 무언가. 그게 지금의 나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처음 보는 거지? 거울 보여 줄게. 따라와."

엘스가 무릎을 펴면서 일어섰다. 그녀의 키가 위로 쭉 올라갔다. 시야가 위로 따라가다가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 아, 그렇구나. 나는 키가 매우 작아진 거구나.

물웅덩이의 거울

"이쪽으로 와. 굴러 와도 되고, 미끄러져 와도 되고. 마음대로 와."

엘스가 두 발짝 정도 떨어진 곳에 무릎을 꿇고 손짓했다. 그쪽 방향에 작은 물웅덩이가 풀숲 사이에 있었다. 햇빛이 한 줄기 위에서 물웅덩이 위로 쏟아져 내렸다. 물의 표면이 거울처럼 반짝였다.

움직이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를 몰랐다. 사람의 몸이라면 다리에 힘을 주면 발이 앞으로 나간다. 그런데 다리가 없는 지금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한참을 끙끙대다가 무의식적으로 「앞으로 가자」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 순간 슬라임의 몸 전체가 한쪽으로 출렁 했다가 그쪽으로 굴러 갔다.

"오~ 잘 굴러간다. 슬라임도 처음 굴러갈 때는 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거쳐. 좋아 좋아."

엘스가 손뼉을 짝짝 가볍게 쳤다. 그 손뼉 소리에 묘하게 격려가 담겨 있어서 한 번 더 「앞으로」를 외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어느새 물웅덩이 앞에 도착해 있었다.

물 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물웅덩이 위에 비친 자그마한 노란 빛깔의 둥근 젤리.
노란빛 가운데에 살짝 은빛이 마블링처럼 섞여 흐른다.
크기는 럭비공 정도. 무게는 거의 없는 듯.
젤리의 한가운데에 향정고 교복의 와이셔츠와 짙은 회색 바지가 둥둥 떠다니고 있다.
그 옆에는 검은 가방 하나도 함께.

"…진짜로 슬라임이네. 진짜로."

하지만 어딘가 익숙했다. 어제 야광석 해변에서 손등에 묻은 노란빛으로 빛나던 그 알갱이들. 그 빛깔이 지금 내 몸 전체를 이루고 있었다.

"노란 슬라임. 그것도 가운데에 살짝 은빛이 섞인. 흠… 「하이슬라임족」 중에서도 거의 보기 힘든 종이야. 색깔이 「두 가지」인 슬라임은 보통 진화 직전이거든."

엘스가 무릎을 꿇은 채로 물웅덩이 옆에 자리를 잡고 자기 손가락으로 자기 강아지 귀를 조용히 만지작거렸다. 어쩐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너, 정말로 외대륙에 그냥 떨어진 거 맞아? 어디서 보낸 거 아니야?"

엘스의 눈동자가 진지하게 깊어졌다. 그녀의 시선이 어제까지의 가벼움과는 다르게 무겁게 슬라임의 몸 위로 떨어졌다.

대답하고 싶었다. 그런데 입에서 나오는 것은 「뿌루루」와 「뿌릉」 두 가지뿐. 사람의 언어로 무언가를 전달할 방법이 없었다.

엘스도 그것을 알았는지, 두 손바닥을 가볍게 들어올리며 살짝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 미안. 내가 너무 갑자기 진지한 얘기를 했네. 일단 너를 우리 집으로 데려갈게. 거기서 너를 사람의 모습으로 다시 돌려놓을 방법을 알려줄 테니까."

향정숲

엘스는 자기 망토 안쪽에서 헝겊으로 만든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의 입구가 묘하게 넉넉했다. 그녀가 입구를 활짝 벌리고 미소를 지었다.

"이 안에 들어가. 사람한테 들고 다니면 너 무거우니까."

슬라임 상태로 작은 주머니에 들어가는 것 그 자체로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앞으로」를 외쳐 보았다. 슬라임의 몸이 굴러서 주머니 입구로 들어갔다. 안쪽은 묘하게 넓었다. 차원의 마법, 같은 무언가일까.

엘스가 주머니를 자기 가방의 옆구리에 매달았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어딘가로 걷기 시작했다.

주머니 안쪽에는 묘하게도 작은 창문 같은 투명한 천이 한쪽 면에 붙어 있었다. 그 창문을 통해 바깥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엘스가 걷는 길은 빽빽한 숲이었다. 키가 큰 나무들이 머리 위에서 잎사귀를 가득 펼치고 햇빛이 점점이 그 사이로 떨어졌다. 풀잎의 향기가 묘하게 익숙했다.

…향나무. 향나무 향기였다.

'…향나무 향기. 어디서 맡아본 향기인데.'

기억의 한구석에서 매일 5교시 수학 시간에 창밖으로 바라보던 거대한 그 나무가 떠올랐다. 학교 옥상 난간을 살짝 넘기는 키 큰 고목. 향나무처럼 은은한 향기를 풍기던 바로 그 나무.

"…여기, 「향정숲」이라고 해. 이 외대륙 동안에서 가장 큰 숲이지. 이 숲에는 우리 같은 「하프와일드라이프」들이 많이 살아."

엘스가 어딘가에서 들리지 않을 누군가에게 설명하듯,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말했다. 슬라임 주머니 안의 나에게 들으라는 듯이.

…향정숲.

향정고와 같은 이름의 숲이었다. 어제 보았던 「향정해」와 같은 이름. 향정고에서 「향정」은 학교 이름에서 떼어낼 수 없는 고유명사처럼 느껴졌는데, 이 세계에는 그 「향정」이 바다에도 숲에도 붙어 있었다.

우연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정확했다.

A002의 발자국

한참을 걸은 끝에, 엘스의 발걸음이 어느 작은 빈터 앞에서 멈췄다.

주머니의 작은 창으로 바깥을 보니, 거기는 묘하게도 다른 곳들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풀잎 한 포기 자라지 않은 둥글게 패인 자리. 직경이 어림잡아 5미터 정도. 마치 누군가 잔디를 잘라낸 듯한 정확한 원형.

엘스가 그 빈터의 가장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손이 풀이 자라지 않는 그 둥근 자리에 닿았다.

"…여기에 「A002」가 새겨져 있어."

엘스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 한 마디에 슬라임 몸 전체가 한 번에 진동했다.

A002.

어제까지 향정고등학교 도서관의 사라진 책장의 분류번호. 사서 책상 옆에서 사서교사 경환 선생님이 「000-A002를 찾아가 봐」라고 가르쳐 주셨던 그 분류번호. 석양빛이 만든 그림자가 가리킨 그 책의 위치 표시.

그것이 여기 향정숲의 한 빈터에 새겨져 있다고 한다.

엘스가 손바닥으로 둥근 자리의 한가운데를 부드럽게 쓸었다. 그녀의 손이 지나간 자리에 흙이 살짝 양옆으로 갈라졌다. 갈라진 흙 사이로 검은 직사각형 모양의 돌이 살짝 드러났다.

검은 돌의 표면에 흰색 양각으로 분명히 새겨져 있었다.

A 0 0 2

향정숲 한가운데의 빈터, 둥근 원의 중심에 검은 돌에 새겨진 흰 양각

…말도 안 된다.

향정고등학교 도서관의 분류번호 A002. 그것이 향정숲의 한가운데 땅바닥에 새겨져 있다.

하나의 가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두려운 가설.

「향정숲」은 「향정고」가 있던 자리, 의 다른 시간대 모습이다.

학교가 들어서기 전 또는 학교가 사라진 후 의 향정고 자리. 그 자리에 도서관의 A002 서가가 있었던 위치가 정확히 표시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는, 우리 「향정숲」의 「성지」 같은 곳이야."

엘스가 검은 돌의 표면을 부드럽게 한 번 더 쓸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묘한 경건함이 깃들어 있었다.

"옛날부터 우리 종족 안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어. 「언젠가 이 빈터에서 한 명의 인간이 깨어날 것이다. 그때가 큰 변화의 시작이다」 라는 이야기. 그래서 우리는 매일 이 빈터를 지키고 있었어. 누군가가 깨어나면 도와주려고."

엘스가 슬라임 주머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동자에 묘한 빛이 깃들어 있었다.

"어제 야광석 해변에서 너를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어, 슬라임씨. 우리 종족의 어른들이 한 마리의 새가 너의 위치를 알려준다고 했거든. 「외해의 동쪽 모서리, 야광석이 한꺼번에 빛나는 곳」이라고. 그래서 내가 그쪽으로 갔던 거야."

엘스가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덧붙였다.

"…그리고 깨어난 자리에 A002가 새겨져 있다는 것은 너는 우리가 800년 동안 기다려온 그 사람이라는 뜻이지."

눈을 감는 태양 (다시)

엘스의 마지막 한 마디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처럼 울렸다.

「800년 동안 기다려온 그 사람」.

…그게 나라고? 어제까지 향정고 1학년 4반에서 수학 문제 한 줄에 머리를 싸매던 17세의 평범한 한 학생이?

'…뭔가의 착오일 거야. 분명히. 그래야만 한다.'

엘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검은 돌에 흙을 다시 살며시 덮어 가린 다음 한 손으로 슬라임 주머니의 입구를 다잡았다.

"이제 우리 집에 가서 너를 사람의 모습으로 돌려 놓을 방법을 알려줄게. 일단 너에게 「자기 명명」을 시켜야 해. 그게 오늘의 가장 중요한 일이야."

자기 명명.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그것을 해야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한다. 슬라임의 몸으로는 여러 가지가 불편할 게 분명하므로, 어떻게든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했다.

엘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향정숲의 좁은 길을 따라 한 시간쯤 걸었을까. 머리 위의 햇빛이 점점 약해지더니, 어느 순간 갑자기 한 번에 사라졌다.

"앗, 또 눈을 감네. 일찍 감기네 오늘은."

엘스의 가벼운 한 마디가 들렸다. 슬라임 주머니 안에서 작은 창문을 통해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 거대한 둥근 빛 덩어리가 떠 있었다. 그리고 그 둥근 빛 덩어리의 한가운데에 분명히 큰 눈동자 하나가 있었다. 그 눈동자가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감기는 중이었다.

눈감는 태양.

어제 야광석 해변에서 보았던 그 태양이었다. 그것이 다시 한 번 눈을 감고 있었다.

"…자, 이제 곧 두 번째 시대가 시작돼. 보고 있어, 슬라임씨. 이 세계가 어떻게 다시 만들어지는지를."

엘스의 한 마디와 함께 태양의 눈이 완전히 감겼다. 그 순간 머리 위 하늘이 한 번에 까매졌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까매진 하늘 위로 어떤 무늬가 천천히 떠올랐다.

처음엔 그것이 무슨 무늬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무늬가 점점 또렷해질수록 그것이 어떤 익숙한 도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9개의 동심원. 그리고 그 한가운데의 한 점.

天 下 圖

까매진 하늘 위에 거대한 9개의 동심원이 떠올랐다.
가장 안쪽 원 중원, 그 중심에 부주산.
그 다음 원들 내해, 외륜, 외해, 이외, 삼경, 사허, 오극, 그리고 무(無).
무의 영역은 가장 바깥쪽 검고 깊은 어둠.
9중의 천하도가 살아 있는 별자리처럼 하늘 위에 펼쳐졌다.

"…와아."

슬라임 주머니 안에서 진동음이 흘러나왔다. 진동음에 감탄의 의미가 들어 있었기를 바라며.

엘스가 한 손으로 자기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이게 「태양이 눈을 감을 때」의 풍경이야. 우리 종족 사이에서는 「천하도가 하늘을 펼치는 시간」이라고 불러. 짧으면 1분, 길면 5분. 그동안 시간이 우리 영역의 시간을 새로 골라내."

"…시간이 시간을 골라내?"

슬라임 주머니 안에서 「뿌루룽」 진동음을 보냈지만 엘스는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그녀는 자기 설명을 계속해 주었다.

"태양이 눈을 감으면 천하도가 하늘에 펼쳐지고 그동안 우리가 사는 이 영역의 시대가 다시 골라져. 어제는 어떤 시대였는지 모르지만 지금부터는 또 다른 시대야. 슬라임씨, 너는 운이 좋아. 「하이슬라임 진화」가 시대 변환과 같이 일어났으니까. 다른 시대의 슬라임도 도와줄 수 있는 종이 되는 거야."

엘스의 설명은 머릿속에서 절반만 이해되었다. 시대가 골라진다, 라는 말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세계에서는 시간이 우리가 알던 일직선의 흐름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하늘 위에서 천하도의 9중 동심원이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한 번 회전할 때마다 동심원의 색이 조금씩 바뀌었다. 처음엔 노란색이었다가, 회색이었다가, 다시 파란색이었다가, 어느 순간 마지막 한 번의 회전과 함께 9중 동심원이 한 번에 사라졌다.

그리고 하늘 한가운데에서 태양이 다시 눈을 떴다.

눈을 뜬 태양은 살짝 다른 빛깔이었다. 어제의 태양보다 약간 더 푸른 빛이 도는 햇살. 같은 태양인데 다른 시대의 태양인 듯했다.

엘스가 한 번 깊은 숨을 들이마시면서 미소 지었다.

"이번 시대는 우리 종족이 가장 좋아하는 시대네. 「청자(青慈)의 시대」라고 부르거든. 햇살이 부드럽고 식물이 잘 자라는 시대. 운이 좋네, 슬라임씨."

엘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푸른 빛이 도는 새로운 햇살이 향정숲의 잎사귀들 사이로 점점이 떨어져 내렸다. 어쩐지 잎사귀의 색조차도 어제보다 조금 푸르스름하게 보이는 듯했다.

'…정말 시대가 바뀐 거구나. 같은 숲인데 다른 시대의 같은 숲. 같은 태양인데 다른 시대의 같은 태양. 같은 나무인데 다른 시대의 같은 나무.'

머리가 어지러워져 가는 슬라임의 시야 안에, 엘스의 작은 등이 한 걸음 한 걸음 멀어져 갔다. 그녀의 망토 자락이 새로운 시대의 푸른 햇살을 받으며 가볍게 흔들렸다.

슬라임 주머니의 작은 창문 너머로 그녀의 강아지 귀 끝이 살짝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이 묘하게 사랑스러웠다.

…사람이 사람일 때만 누군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구나. 슬라임의 몸이 되어서도 누군가를 사랑스럽게 볼 수 있구나, 라는 묘한 깨달음이 머릿속에 잠시 머물렀다.

엘스가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슬라임 주머니의 작은 창문 너머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엘스가 짧은 미소를 지으면서, 거의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한 마디를 흘렸다.

"…천천히 가자, 슬라임씨. 우리에겐 800년 만의 첫 만남인데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잖아."

800년 만의 첫 만남.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의 한 마디가 슬라임의 작은 몸 안에서 묘한 진동을 만들었다.

눈을 다시 뜬 태양 아래에서, 푸른 햇살을 받으며, 한 명의 강아지 귀의 소녀와 한 마리의 노란 마블링의 슬라임이 향정숲의 좁은 오솔길을 천천히 걸어갔다.

아주 천천히. 새로운 시대의 첫 발걸음을 한 발짝씩 한 발짝씩.

— 第四話 끝 —

▸ 第五話 「시대의 필드」로 이어집니다.

▣ 작가 노트

"하프와일드라이프(Half-wildlife)"는 본 작품의 설정으로, 산해경에 등장하는 「반인반수」의 외대륙 거주 종족입니다. 인간의 형태에 동물의 일부 특성(귀, 꼬리, 발 등)을 가지며, 사회성과 문명을 갖추고 있습니다. 향정숲의 빈터에 새겨진 「A002」는 향정고등학교 도서관과 같은 좌표 즉, 두 세계가 같은 지점에서 만나고 있다는 단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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