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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속 어딘가에 묻혀 있을, 우주 어딘가에 잠자고 있을, 지구 어딘가에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숨겨진 보물들을 같이 찾아봐요!
지리학자의 본질/지리소설 메르카토르

제5화 — 유정충의 바다

by 덕지덕지 2026. 7. 25.

제5화 — 유정충의 바다

— 1 —

다리의 끝이 바다에 닿는 자리에서 KA가 멈춰 섰다.

등 갑각 한가운데가 갈라지며, 두 사람이 앉아 있던 자리 아래로 좁은 통로가 열렸다. 통로 안에 엷은 푸른빛이 어려, 둥근 창 두 개와 그 옆에 하나씩 놓인 좌석을 비췄다.

메르가 먼저 내려갔다. 토르가 뒤따랐다. 두 사람이 앉자 등 갑각이 다시 닫혔고, 다리가 안으로 접혔다.

KA가 다리 위를 미끄러져 바다로 들어갔다. 물이 갑각 옆면을 타고 올라와 둥근 창의 절반을 푸르게 가렸다. 잠깐 사이에 남은 절반의 하늘까지 푸름에 잠겼다.

두 사람이 동시에 호흡을 늦췄다. 갑각 안의 공기는 그대로였다.

"공기가 줄지 않소."

"줄지 않는다. 외피가 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공기는 안에서 만든다."

토르가 그 말을 두 번 곱씹었다. 갑각이 공기를 만든다는 것이 산비탈 마을의 어휘로는 옮겨지지 않았다.

"어떻게 만드오."

메르가 옆에서 엷게 웃었다.

"우스워서 웃는 게 아니에요." 메르가 급히 덧붙였다. "토르가 묻는 방식이 좋아서요. 한국 사람들은 모르는 걸 잘 안 드러내요. 묻는 게 부끄러운 일이라고 배우거든요."

"묻는 게 부끄럽다고 가르치오?"

"네."

"그건 뒤집힌 가르침이오."

토르의 짧은 대답에 엷은 어이없음이 섞여 있었다. 메르가 그 웃음을 받았다.

메르는 대학원 첫 학기를 떠올렸다. 세미나에서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한 사람이 그 학기 내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그 이후로 메르도 모르는 것을 아는 얼굴로 듣는 법을 배웠다. 익히는 데 반년이 걸렸고, 그게 학문하는 사람의 자세라고 오래 믿었다.

산비탈 마을에서는 그게 그냥 거짓말이었다.

"처음이죠." 메르가 짧게 말했다.

"그렇소."

"저도요. 바다는 봤지만 바다 아래는 처음이에요."

처음이라는 말이 두 사람 사이 같은 자리에 놓였다. 평원의 안개 너머에서, 빙하의 푸른빛 위에서, 얼음 아래 시장 안에서, 두 사람은 계속 같은 처음을 함께 지나오고 있었다.

토르의 가슴빛이 한 줄기 엷게 새어 나와, 메르 옆의 공기에 머물렀다.

— 2 —

바다의 깊이가 짙은 푸름에서 검푸른 어둠으로 넘어갔다.

한참 동안 어둠뿐이었다. 다만 완전한 어둠은 아니었다. 아주 멀리에서 무엇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살아 있는 어둠이었다.

"저기." 메르가 손가락을 들었다.

멀리서 작은 빛이 떠올랐다. 점 하나가 둘이 되고 다섯이 되더니, 갈래로 번져 어둠 한 면을 점점이 채웠다. 노란빛, 엷은 보랏빛, 거의 흰빛. 점들이 보이지 않는 흐름을 타고 같은 방향으로 흘렀다.

"유정충(油晶蟲). 기름의 결정에 깃든 작은 짐승. 바다 깊은 데 알을 낳는 자리에 모인다. 산란지다."

빛 알갱이가 둥근 창 옆을 지나갔다. 곤충이라기보다 살아 있는 결정에 가까웠다. 알갱이 안에서 빛이 박동하듯 켜졌다 꺼졌다.

어떤 알갱이가 빛나면, 옆 알갱이가 두 호흡 늦게 빛났다.

메르가 창에 이마를 붙였다.

"마을 사당의 등불 같소." 토르가 말했다. "무녀가 일곱 개를 차례로 켰소. 한꺼번에 켜지면 죽은 자가 길을 잃고, 차례로 켜져야 제 길을 짚어 간다고 했소."

메르가 토르의 옆얼굴을 살폈다. 사당이 토르의 마을에 남아 있는 게 아니라 토르의 가슴 한구석에 그대로 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메르가 투영봉을 뽑았다. 일곱 가닥의 측량선이 산란지의 흐름을 망(網)의 모양으로 그려 냈다.

"흩어지는 것처럼 보이는데 아니에요. 정해진 망을 따라요."

메르가 손가락으로 창 위에 선을 그었다.

"한 점이 다음 점에 신호를 넘기고, 그 점이 또 다음 점에 넘겨요. 봉수예요. 남산 꼭대기에 봉수대 터가 남아 있거든요. 변방에서 불을 올리면 다음 봉우리가 받고, 그렇게 반나절이면 한양까지 닿았대요."

"마을에도 있소. 산비탈 봉우리마다 횃불 터가 있소."

"사당의 등불도, 봉수도, 여기 알갱이도 전부 같은 거예요. 다음으로 넘기는 망. 여기는 사람이 없으니까 짐승이 그걸 하는 거고요."

메르가 말을 끊었다.

방금 자기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가 뒤늦게 도착했다.

기름의 결정에 깃든 짐승. 바다 깊은 곳의 산란지.

"KA. 이 짐승이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가라앉는다. 쌓인다. 오래 눌린다."

메르가 좌석 등받이에 몸을 붙였다.

석유의 생물기원설. 지질학 개론 3주차. 수억 년 전 바다에 살던 것들이 죽어 가라앉고, 산소 없는 퇴적층에 묻히고, 지열과 압력을 오래 받아 다른 물질로 바뀐다. 시험에 나올 만한 내용이라 메르는 밑줄까지 쳐 두었다.

그러니까 지구의 석유도 전부 이랬다. 한때 바다에서 빛나며 헤엄치던 것들이었다.

메르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시험도 봤고 답도 맞혔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지금 처음 알았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을 때마다 무엇을 태우고 있었는지를.

"우리는 이걸 알면서 잊었어요." 메르가 말했다. "여기 사람들은 아예 모르고요. 어느 쪽이 더 나쁜지 모르겠어요."

메르의 외투 안주머니에서 잃어버린 산해경의 페이지가 따뜻해졌다. 比目 두 글자 옆에 새 문장이 떠올라 있었다.

토르가 품에서 책을 꺼냈다. 두 권이었다. 산경과 해경. 마을에서는 둘을 묶어 산해경이라 불렀지만, 바다에 관한 것은 해경 쪽에만 있었다.

토르가 해경의 표지에 손바닥을 얹었다. 파도 모양이 어렸다. 표지가 열리며 책의 면이 떠올랐고, 비목어(比目魚) 세 글자가 또렷해졌다.

"비목어."

토르의 손바닥 위 빛이 가는 줄기로 길어져 둥근 창의 외피를 통과해 바다로 흘러갔다.

산란지 가장자리에서 빛 점들의 무리가 갈라졌다. 그 너머에서 두 그림자가 솟아올라 둥근 창 앞에 멈춰 섰다.

두 마리의 짐승이었다.

첫 번째 비목어는 머리 오른쪽에만 눈이 박혀 있었고, 왼쪽은 매끈한 비늘이 덮고 있었다. 두 번째는 그 반대였다. 두 짐승의 빈 자리가, 본디부터 비어 있기로 되어 있었다는 듯 흠 없이 매끈했다.

두 마리가 같은 호흡으로 헤엄쳤다. 첫 번째가 기울면 두 번째도 똑같이 기울었고, 첫 번째가 멈추면 두 번째도 같은 순간 멈췄다. 옆구리를 맞대고 함께 헤엄칠 때에야, 두 머리의 눈이 양쪽에 두 점으로 모두 갖춰졌다.

"그렇구만. 한쪽이 한쪽을 살펴 가는 거요."

메르가 그 말을 받았다. 얼음 아래 시장에서 노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둘이었다. 한쪽이 한쪽을 살피는 모양이었다.* 노인이 가리킨 것이 백 년 전의 두 발자국이기도 했고, 지금 창밖의 두 마리이기도 했다.

유정충 한 알갱이가 두 비목어 사이로 흘러갔다.

알갱이가 첫 번째 비목어의 빈 눈에 닿아 또렷한 점으로 들어앉았다. 본디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빛이 그대로 한쪽 눈이 되었다. 또 다른 알갱이가 두 번째 비목어의 빈 눈에 닿았다.

두 짐승의 눈이 모두 채워졌다.

두 마리가 옆으로 붙어 한 줄이 되었고, 옆구리가 맞닿는 자리에서 두 몸이 가는 빛으로 얽혀 한 마리의 모양이 되었다. 잠깐 사이에 다시 두 절반으로 갈라졌고, 눈의 빛이 알갱이가 되어 무리로 흘러갔다.

메르가 갑각 벽에 손을 짚었다.

박사과정 다섯 학기 동안 화면 앞에서 본 모든 망이 저 짐승 안에 들어 있었다. 두 절반이 붙었다 떨어지는 것과, 망의 점들이 신호를 넘기는 것이 같은 일이었다. 연결되어야만 존재하는 것들. 혼자서는 좌표 하나에 불과한 것들.

"한 종이네요. 산해경의 비목어랑, 이 바다의 유정충이."

"본디 같은 짐승이라는 거요."

"두 지구가 한 의식 안에 있다."

KA의 말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두 세계가 그저 다른 두 행성이 아니라, 깊은 어딘가에서 같은 의식으로 묶여 있는 두 개의 표현이라는 뜻이었다.

메르의 머릿속에 어머니가 책상에 두고 간 도법의 첫 줄이 떠올랐다.

 

지도의 끝은 항상 바다야.

어렸을 때 메르는 그것을 지도학의 문장으로 읽었다. 육지를 다 그리고 나면 남는 것이 바다니까. 그런데 어머니는 문장을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뒤에 한 줄이 더 있었고, 메르는 그 줄을 이해하지 못해서 오래 잊고 있었다.

 

바다의 끝은 항상 다른 곳의 시작이지.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12년 전에 출장지에서 사라진 게 아니었다. 두 세계가 하나의 의식으로 묶여 있는 그 이음매 어딘가로 건너간 것이었다.

 

당신 어머니는 살아 있다.

검은 망토가 두고 간 그 한마디가 흔들기 위한 거짓말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가슴 한구석에서 엷게 자랐다. 메르는 그 의심을 반가워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반가워하기 시작하면 판단이 흐려진다는 것을, 데이터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알고 있었다.

— 3 —

두 비목어가 산란지 가장자리로 돌아갔다. 토르가 해경의 표지를 닫자 두 짐승이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한 곳만 더. 받아 둘 것이 있다."

갑각 옆면에 작은 출입구가 열렸다. 손이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너머에 엷은 막이 어려 물을 막고 있었다.

"손을 넣어요?"

"한 마리가 닿고 싶어 한다."

검은 자국이 있는 손이 출입구 쪽으로 갔다.

토르가 옆에서 잠깐 굳었다. 사절이 새기고 간 자국 위에 또 다른 무엇이 닿는다는 것이 무겁게 걸렸다. 다만 KA의 말에 함정의 기색이 없다는 것을, 토르가 평원에서 익힌 사냥의 감각으로 알아챘다. 토르는 메르의 손을 막지 않았다.

메르의 손이 엷은 막을 통과했다. 손목까지 바닷물에 잠겼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살갗에 닿는 무게가 이상하리만치 가벼웠다. 이 깊이면 손이 눌리는 느낌이 있어야 했다. 수심 100미터만 돼도 11기압이다. 그런데 물이 자기 무게를 이 손에는 얹지 않기로 한 것 같았다.

사람이 무엇을 만지러 들어와도 좋은 자리라는 듯이.

알갱이 하나가 흐름을 거슬러 와 메르의 손가락 옆에 멈췄다.

무리에서 하나가 떨어져 나온 게 아니었다. 무리 전체가 하나를 골라 메르 쪽으로 내보내는 모양이었다.

알갱이가 손목에 닿았다. 검은 자국 옆, 살갗이 매끈한 자리였다.

따끔하지 않았다. 따뜻한 것이 살갗 안으로 스며들며 빛으로 점을 찍어 갔다. 점들이 모여 작은 인장(印章)의 모양이 되었다.

어제 새겨진 검은 자국은 사절이 밖에서 찍고 간 것이었다. 이 빛 인장은 유정충 무리가 메르라는 사람을 받아들였다는 표시였다.

한쪽은 강제로 새겨진 것. 다른 쪽은 메르가 받아들인 것.

메르가 손을 거두었다. 손목 위에 두 자국이 나란히 있었다. 검은 자국이 짙어지지도 엷어지지도 않았고, 빛 인장이 번지지도 않았다. 두 자국이 서로를 살펴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토르가 소매 위로 가슴빛을 옮겼다. 빛이 두 자국 사이 빈 살갗에 잠깐 머물렀다 거두어졌다.

"고마워요."

"한쪽씩이오."

둥근 창 너머의 어둠이 옆으로 갈라지더니, 멀리 거대한 네 개의 기둥이 바다 바닥에서 솟아 있었다. 그 위에 너른 판이 얹혀 있고, 판 위에서 엷은 등불 무리가 깜박였다.

"페트로나스. B국의 인공 섬 도시. 바다 바닥의 네 기둥이 도시를 받친다. 페트로나스 사람들은 기름을 끌어 올려 도시를 켠다. 그 기름이 어떤 짐승의 결정인지는, 그쪽 어휘에 없다."

메르가 그 등불들을 한참 보았다.

저 도시는 지금 산란지 위에 서서, 산란지가 만든 것을 태우고 있었다. 그것도 모르는 채로.

울산에 갔을 때 본 야경이 떠올랐다. 학부 답사였고, 밤의 석유화학단지가 도시보다 밝았다. 다들 예쁘다고 사진을 찍었다. 그때는 메르도 찍었다.

"우리도 몰랐어요." 메르가 말했다. "정확히는, 알면서 안 보기로 했던 것 같아요."

손목의 빛 인장이 무리의 박동에 맞춰 엷게 깜박였다. 무리가 메르를 자기들의 한 자락으로 받아들였다는 표시였다.

KA가 페트로나스의 등불 쪽으로 천천히 향했다.

— 4 —

KA가 거대한 강철 기둥의 빈 속을 타고 올라가 수면을 뚫었다.

엔진 굉음이 토르의 귀를 한꺼번에 덮쳤다. 짐승 수십 마리가 동시에 우는 소리 같았다. 다만 짐승의 울음에는 잦아드는 데가 있는데, 이 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한쪽이 낮아지면 다른 쪽이 일어나서, 도시 전체가 쉬지 않고 울었다.

"뭐요, 이게."

"사람이 만든 도시예요. 토르는 처음이겠네요."

갑각 옆문이 열리자 매캐한 냄새가 들어왔다.

"석유 냄새예요. 한국에서 자동차에 넣는 거요."

말해 놓고 메르는 조금 전에 자기가 본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다음 문장을 삼켰다.

KA의 갑각이 두 사람 뒤에서 모양을 바꾸기 시작했다. 둥근 잠수정 갑각이 옆으로 길어졌고, 접혀 있던 다리가 나와 끝이 동그란 바퀴가 되었다. 둥근 창이 넷으로 늘어 차량의 앞 창과 옆 창처럼 자리를 잡았다.

평원, 빙하, 잠수정에 이은 네 번째 모양이었다. 메르는 이 짐승이 앞으로 몇 번을 더 바꿀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가,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접어 둘 질문 목록이 또 한 줄 길어졌다.

토르가 가슴 구멍 위에 미나가 챙겨 준 갈색 천을 둘러 구멍을 가렸다.

차량이 된 KA가 거대한 원형 광장으로 빠져나왔다. 사방에서 차들이 굉음을 내며 오갔다. 광장 한가운데 강철 기둥 꼭대기에 글자 하나가 붉게 빛났다.

 

기름이 넘치는 곳. 페트로나스의 한자 표기였다.

메르가 광장 한쪽 음식 좌판에서 메르카토르라는 말을 물었다.

주인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 그러더니 턱으로 광장 동쪽을 가리켰다.

"그거 묻는 사람 가끔 있어. 다 같은 데로 보내 줘. 오늘 마침 레이싱 날이거든. 5킬로 직선. 우승하면 왕가 응접실에 초대받아. 그 말 들으려면 거기 들어가야 해."

두 사람이 광장 동쪽 출발선으로 갔다. 등록대 직원이 기름을 안 쓰는 차는 의심을 살 거라고 했다. 메르가 그래도 하겠다고 했다.

출발선에 다섯 대가 줄지어 서 있었다. 강철판을 덧댄 여섯 바퀴 트럭, 사슬을 두른 검은 오토바이, 沃 글자가 새겨진 왕가 후원 차량.

메르 옆은 노란빛 오토바이였다. 운전자가 헬멧을 옆구리에 끼고 메르를 훑어봤다.

"빙하 쪽에서 왔지? 이름은?"

"메르예요."

"옥탄. 여기 토박이." 그가 턱으로 코스를 가리켰다. "행운을 빌어 주고 싶은데, 그 전에 알려 줄 게 있어. 코스 중간에 함정이 두 군데 있어. 누가 매년 폭탄을 묻어. 왕가는 모르는 척하고. 운이 반, 감이 반이야."

옥탄이 헬멧을 썼다.

"내가 우승하면 좋겠지만, 그쪽도 죽지는 마."

메르가 갑각에 올라 함정 이야기를 토르에게 옮겼다.

"측량선으로 미리 짚을게요. 토르는 가슴빛으로 KA의 바퀴가 갈 자리를 그어 주세요. 빙하에서 활시위에 빛을 걸었던 것처럼, 이번엔 다리에 거는 거예요."

"짚는 데 얼마나 걸리오."

메르가 잠깐 계산했다. 측량선이 닿는 거리, 이 차가 낼 속도, 토르가 빛을 옮기는 데 걸리는 시간.

"제가 짚고 토르가 옮기는 데까지 1초쯤이요. 그 속도면 1초에 40미터를 가요. 그러니까 40미터 앞에서 알아채면 늦어요."

"그럼 더 멀리 짚으시오."

"네. 그게 결론이에요."

메르는 이 사람의 사고방식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학회에서 만난 어떤 사람들보다 결론까지 빨랐다.

 



출발 신호가 떨어졌다.

여섯 대가 한꺼번에 튀어 나갔다. 메르가 측량선을 두 가닥으로 띄워 앞을 짚었다. 1킬로미터 지점 왼쪽 차선에서 신호가 걸렸고, 토르의 가슴빛이 KA의 바퀴를 끌어당겼다. KA가 그 자리를 비켰다.

메르의 짚기가 옆 차선의 옥탄까지 살렸다. 다음 순간 도로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났으나, 폭발한 자리에 차가 한 대도 없었다.

검은 오토바이가 첫 함정에 휘말려 굴러떨어졌다. 여섯 바퀴 트럭은 코너에서 갓길을 들이받고 멈췄다.

KA가 沃 차량을 추월하자, 그 차가 양옆에서 화염을 뿜었다. 토르의 가슴빛이 옆 바퀴를 끌어당겨 KA가 불길을 비껴 나갔다.

4킬로미터 지점의 두 번째 함정에서는 옥탄이 KA보다 늦게 차선을 바꿨고, 폭발의 가장자리가 뒷바퀴를 스쳤다. 옥탄이 옆으로 굴렀다. 그리고 일어서서 KA 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죽지는 않았다는 신호였다.

KA가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했다.

빙하 쪽 외투를 입은 외부인이, 기름을 쓰지 않는 차로 우승했다. 짧은 침묵이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 박수를 쳤고, 박수가 광장 한쪽을 채웠다.

— 5 —

시상식이 결승선 옆 단상에서 열렸다. 단상 가운데에 작은 트로피와 검은 봉인이 찍힌 봉투가 놓여 있었다. 봉투 안에 페트로나스 왕가의 비밀 지도가 들어 있다고 했다.

단상 위로 사회자가 올라왔다.

여성이었다. 페트로나스의 가죽 외투를 길게 늘어뜨려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있었다.

얼굴이 메르의 시야에 들어온 순간, 메르의 호흡이 굳었다.

어디서 본 얼굴이었다. 어디서인지는 떠오르지 않는데, 가슴 한구석이 먼저 흔들렸다.

메르가 단상에 올라 트로피를 받았다.

사회자가 다가오는 동안, 갈색 천 너머에서 토르의 가슴빛이 평소보다 미세하게 떨렸다. 두 사람 사이에 다른 무게를 가진 사람이 들어와 있다는 신호였다.

사회자가 트로피를 건넸다. 메르가 그 얼굴을 가까이서 마주 봤다.

사회자의 입가가 살짝 풀렸다. 미소였다.

단상 위에서 짓는 직무상의 미소였을 수도 있다. 다만 메르의 가슴이 그 미소를 다른 데서 알아봤다. 입꼬리 한쪽이 아주 조금 더 올라가고, 눈가에 같은 모양의 주름이 잡히고, 입과 눈이 같은 속도로 함께 풀리는 것.

12년 전 책상 모서리의 사진 속에서 어머니가 짓고 있던 미소였다.

시간이 멎었다.

메르는 어머니의 미소를 12년 동안 사진 한 장으로만 갖고 있었다. 사진 속 미소는 정지해 있어서, 시간이 갈수록 그게 정말 어머니의 미소인지 자기가 외운 이미지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방금 그 미소가 움직였다.

다음 순간 미소가 사라졌다. 표정이 직무상의 평정으로 돌아갔다.

"저기요."

사회자가 메르를 바라봤다. 시선은 정중했다. 다만 그 안에 메르를 알아보는 빛이 없었다. 처음 보는 우승자를 보는 눈이었다.

"네, 우승자님."

메르가 다음 말을 잡지 못했다.

두 가지가 동시에 목까지 올라와 있었다.

하나는 묻고 싶다는 것이었다. 한 문장이면 됐다. 12년을 끝낼 수 있는 한 문장.

다른 하나는 묻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쪽이 더 컸다.

어제 얼음 아래 시장에서, 메르는 단지들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확인하지 않으면 없는 것이고, 확인하면 있는 것이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지금은 반대였다. 확인하지 않으면 어머니일 수 있고, 확인하면 아닐 수 있었다.

물어서 아니라는 답을 들으면, 이 얼굴은 그냥 남의 얼굴이 된다. 그리고 메르에게는 12년 만에 처음으로 움직이는 어머니의 미소를 본 기억마저 없어진다.

메르는 자기가 지금 데이터를 확인하지 않기로 선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섯 학기 동안 배운 것 전부에 반하는 선택이었다.

"고맙습니다."

메르가 결국 다른 말을 내놨다.

사회자가 봉투를 메르의 손에 얹었다. 검은 봉인이 손바닥에 닿았다.

미소는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 6 —

두 사람이 광장 구석으로 물러났다. 토르의 가슴빛이 갈색 천 너머에서 가는 줄기로 메르의 어깨에 닿았다 거두어졌다.

"사회자가 누구요?"

"미소를 지었어요. 아주 잠깐. 어머니가 짓던 미소랑 같은 모양이었어요. 입꼬리 한쪽이 더 올라가고, 눈가에 같은 주름이 잡히는 거요."

"어머니라는 거요?"

"모르겠어요."

메르가 사진을 꺼냈다. 사진 속 미소와 단상 위의 미소를 다시 맞춰 봤다. 같은 모양이었다.

다만 같은 모양이라는 것이 같은 사람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표본이 하나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1학년 통계 수업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었다.

"지금 물어볼 때는 아닌 것 같아요. 가슴 한구석에 두기로 했어요."

메르가 사진을 접었다.

"KA가 그랬잖아요. 두 지구가 한 의식 안에 있다고. 그게 사실이면, 같은 사람을 다시 만날 길이 어딘가에 또 있을 거예요."

토르가 그 대답을 받았다. 메르가 한구석에 두기로 한 것을, 토르도 함께 두기로 했다.

메르의 어깨에 토르의 가슴빛이 다시 닿았다 거두어졌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지만 그 닿음이 말을 대신했다.

메르가 검은 봉인을 뜯었다.

두꺼운 종이 한 장. 페트로나스 왕가의 비밀 지도였다. 좌표의 한쪽에 큰 별이 그려져 있었고, 그 안에 글자가 있었다.

 

아틀란타 케이지 — 황색 펜타곤(黃色 五角形)

"아틀란타 케이지. 다음 데군. 황색 펜타곤은 뭐요?"

"모르겠어요. 가서 알아내야 할 것 같아요. C국이래요. 여기서 동쪽으로 한참이요."

메르가 지도를 안주머니에 넣었다.

자줏빛 통행증, 회색 통행증, 비티움 좌표, 잃어버린 산해경의 첫 페이지, 어머니의 사진, 투영봉, 그리고 왕가의 지도.

안주머니가 눈에 띄게 무거워져 있었다. 메르가 그 무게를 한 번 눌러 봤다. 논문 자료를 모을 때도 이랬다. 처음엔 종이 몇 장이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 무게가 자기가 어디까지 왔는지를 알려 주는 지표가 된다.

두 사람이 차량이 된 KA에 다시 올랐다.

멀리 페트로나스의 등불 무리 너머로 별 여덟 개가 엷게 어렸다. 아홉 번째가 아직 뜨지 않은 시간의 무게가 두 사람의 등 위로 흘렀다.

다만 메르의 가슴에는 새 무게가 하나 더 들어와 있었다.

단상 위에서 잠깐 풀렸다 사라진 미소. 묻지 않기로 한 물음.

그 물음이, 손목의 검은 자국과 빛 인장 사이 빈자리 옆에 나란히 앉았다.

메르의 손목에는 이제 세 가지가 있었다. 밖에서 새겨진 것, 스스로 받아들인 것, 그리고 확인하지 않기로 한 것.

KA가 페트로나스의 동쪽 도로 위로 미끄러졌다.

(다음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