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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속 어딘가에 묻혀 있을, 우주 어딘가에 잠자고 있을, 지구 어딘가에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숨겨진 보물들을 같이 찾아봐요!
지리학자의 본질/지리소설 메르카토르

제1화 — 두 세계의 시작

by 덕지덕지 2026. 6. 3.

제1화 — 두 세계의 시작

— 1 —

연구실 형광등 한쪽이 또 깜빡거렸다.

김메르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머그잔을 더듬었다. 메르의 맞은편에서는 한숨인지 한탄인지 모를 소리가 새어 나왔다. 윤지였다. 입학할 때부터 같은 책상 줄, 같은 라면 가게 단골인 후배 윤지... 그러나 윤지는 메르를 한 번도 선배라고 부르지 않고 늘 언니라고 불렀다.

어머니 없이 자란 메르에게는 가족으로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보통의 가정과 다르게 두 사람 정도 비어있었다. 윤지는 그 빈칸을 채워 주었던 동생이었다. 

"언니, 또 그거야?"

바퀴 달린 사무용 의자에 앉아 있던 윤지는, 발로 바닥을 밀어내며 의자를 굴려 다가왔다. 메르는 동아시아 위성영상 위에 얇은 격자선이 깔려 있는 화면을 보고 있었다. GIS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그 이미지 위에는 메르가 따로 만든 레이어가 오버랩 되어 있었다. 레이어에는 파란 점선들이 거미줄처럼 엮여 도시와 도시 사이를 잇고 있었다.

"윤지야 이거 누가 짠 망인지 알아? 조선 후기 우역(郵驛). 한양에서 의주까지 가는 의주대로 지선들."

"그게 GIS 박사논문이 돼?"

"되는 거 같아. 의외로."

메르가 마우스를 움직여 새 점 하나를 격자 위에 찍었다. 그러자 점이 맥동하듯 깜박이며 좌우 점들과 거미줄을 만들었다. 그걸 본 윤지가 감탄하듯 입을 작게 벌렸다. 메르 윤지를 힐끗 본 다음 한참 화면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모든 옛 지도가 이렇게 짜여 있어. 봉수, 우역, 사찰 가람배치, 풍수도. 도시와 도시 사이에, 점이 있고 선이 있고 망이 있어. 그리고 거리뷰를 보다 보면 사람 사이에도 연결망이 그려질 때가 있어. 그런데 그 망이 늘 한 군데로 수렴해."

"그게 어딘데?"

메르가 화면 가운데에 노란 점 하나를 찍었다. 윤지가 천천히 좌표를 읽었다.

"이거, 명동 구시가지에 있는 음반 가게 골목 어디쯤이잖아."

"맞아."

그러자 윤지가 의자 다리에 모아 올려두었던 두 발을 확 내리면서 벌떡 일어섰다.

"가자, 명동으로! 이 시간에 가야 진짜 도시가 보여. 술꾼들 다 사라지고, 첫차 기다리는 청소부랑 약 받으러 가는 노인들이랑 새벽 미사 가는 수녀님들. 그 사람들 동선이 사람들 진짜 망이라고 언니가 작년에 학회에서 발표했잖아."

메르가 숨을 한 번 내쉬었다. 책상 위 머그잔을, 깜빡이는 형광등 그림자를, 어깨 너머로 늘어진 자기 머리카락을 한 번 둘러봤다. 무엇 때문인지, 이 풍경을 다시는 못 볼 것 같다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별일 아닐 것이다. 이런 예감은 박사 5학기 차인 메르에게는 어색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 윤지야. 가자"

아직 할증이 풀리지 않았지만 두 대학원생은 택시를 불러 타고 명동으로 향했다. 

새벽 두 시의 명동은 화려함이 다 식어 있는 휴면기에 들어선 도심의 풍경이었다. 환전소 간판이 꺼지고, 오래된 보도의 움푹 들어간 곳에 고여 있는 물기가 가로등 불빛을 살짝 반사하고 있었다. 둘은 이런 풍경을 보면서 음반가게를 향해 걸었다. 마침, 메르는 어머니가 들려준 말을 기억해냈다. 

지도가 가장 진실해지는 시간은, 사람이 가장 적은 시간이야.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옛 건물 1층은 모두 음식점이지만 지금은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닫힌 셔터들 사이로 건물과 건물 사이에 끼워 넣은 듯한 작고 검은 문이 하나 있었다. 그 문 위에는 작은 간판이 있었고 거기에 적힌 상호명은...

어디로든 음반점

메르와 윤지의 걸음이 그 앞에서 멈췄다. 학부 때부터 수십 번 지나간 골목이었는데, 이 가게는 한 번둘다 본 적이 없었다. 한 번도...

— 2 —

가게 안은 좁고 천장이 낮았다. 벽에는 LP가 빽빽이 꽂혀 있었다. 카운터 끝 백열등 아래 노파 한 명이 책을 읽고 있었다. 백발에 푸른빛이 도는 안경. 안경테에 붙인 얇은 진주 한 알.

노파가 고개를 들어 메르를 보았다. 노파의 눈빛은 메르가 본 적 없는 모습이었고 형언할 수 없는 광채를 띠고 있었다. 

"오셨네요."

"제가 여기 올 줄 아셨어요?"

"몰랐죠. 다만 이 가게는 늘 와야 할 사람이 와요. 가게가 사람을 부르는 거지, 사람이 가게를 찾는 게 아닙니다."

노파의 화법은 학회에서 만난, 늙고 친절한 학자의 코멘트 처럼 단어 하나 하나가 날카로웠다. 메르는 콜로키움과 학회에 참여했던 익숙한 기억이 떠올랐다. 너무나도 익숙했던 그 화법과 억양. 아직 학계에 입문하지 않았을 때, 어머니를 따라 군중들이 있는 곳에서 들었던 질서있는 난상토론의 느낌

"혹시 제 어머니를 알고 계세요?"

"알았지요."

"어디 계세요?"

"멀리. 여기서 이 가게 뒷문까지의 거리만큼."

노파의 의자 뒤에 작은 검은 문이 있었다. 손잡이가 닳은, 어디로도 통할 것 같지 않은 문이었다. 노파가 카운터 아래로 손을 뻗었다. 천에 싸인, 가늘고 긴 무언가를 꺼냈다. 노파가 그것을 천천히 올리면서 그것을 감싸고 있었던 천이 풀어졌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검고 가느다란 막대였다. 길이는 한 자 남짓. 한쪽 끝에 작은 황동 캡, 다른 쪽 끝에 새겨진 글자. 옛 한문 같지만 한문은 아닌, 익숙하면서도 처음 보는 표기.

"투영봉(投影棒)이라고 해요. 한자로는 그림자를 던지는 막대라는 뜻이에요. 이 가게에 평생 한 번 와야 할 손님이 가져가는 물건이지요."

"어머니가 두고 가신 거예요?"

"두고 가신 게 아니라, 못 가져가신 거예요."

노파의 눈이 잠시 깊어졌다.

"이걸 가져가시면 손님은 두 번 다시 같은 지도를 못 봐요. 모든 지도가 손님 눈에만 다르게 보일 거예요."

메르는 자기도 모르게 천천히 손을 뻗었다.

"한 가지만 묻고 가져갈게요. 어머니는 지금 살아 계세요?"

"살아 있는 분이 죽었다고 답하기도 어렵고, 죽은 분이 살아 있다고 답하기도 어려워요."

"그건 답이 아니잖아요."

"그렇지만 그게 답이에요, 손님."

메르의 손가락 끝이 검은 막대에 닿았다. 막대는 신기하게 따뜻했다. 사람 체온보다 살짝 낮고, 작은 나무 도구처럼 부드럽고, 그 안에 살아 있는 생명체의 심장 박동 같은 진동이 있었다.

메르가 손에 닿은 막대를 쥐는 순간, 가게가 사라졌다.

노파가, 카운터의 백열등이, LP 벽이, 명동의 골목이 누군가 뒤에서 종이 한 장을 잡아 빼듯 막처럼 빠져나갔다. 빠져나간 후에 보이는 것은 거대한 공간이었고 그 공간에는 역시 거대한 푸른 항성이 떠 있었다. 차가운 푸른빛 표면 위로 붉은 띠가 흐르고, 그 띠 위에 일곱 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그리고 점들은 천천히 눈을 뜨는 것처럼 하나씩 하나씩 메르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노파의 목소리가 메르의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텔레파시 처럼.

"별이 이미 일곱 개의 눈을 떴어요. 열두 개의 눈이 뜨면 모든 것이 끝나요. 행성계가 무너지는 것이죠. 지금까지 딱 한번, 손님 어머님 세대에 거의 그렇게 될 뻔했어요."

"그걸 어머니가 막은 거예요?"

"막은 게 아니에요. 미룬 거예요. 막은 사람은 다음 사람에게 일을 안 남기죠. 미룬 사람은 다음 사람에게 일을 남겨요."

"제가 그 다음 사람이에요?"

"네. 손님 어머님이 손님께 그 일을 물려주실 결심을 하셨어요. 손님이 끝까지 살아남기를 바라시는 의지에요."

푸른 항성의 일곱 눈이 일제히 한 번 깜박였다. 그러자 도시의 윤곽이 돌아오고, 가게가 돌아왔다. 메르의 손에 검은 막대가 쥐여 있었다. 윤지는 메르가 잠깐 멈춰 선 그 순간조차 모르고 있었다.

"또 와도 돼요?"

노파가 잠시, 정말 잠시, 보통의 사람처럼 슬프게 웃었다.

"여기까지 다시 오실 일은 없을 거예요. 부디 그렇게 되길 바래야죠."

문이 닫혔다. 뒤를 돌아봤을 때 어디로든 음반점은 검은 문도 한자 간판도 사라지고, 셔터 내려진 가게들 사이에 빈 벽만 있었다. 윤지는 처음부터 그 가게가 있는지 모르는 듯 했다. 자꾸 왜 여기에 가게가 없는거지? 프로그램이 에러였나?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어디로든 음반가게는 메르에게만 보였던 것이다. 노파와의 대화, 눈을 뜨는 항상의 모습 역시...  

— 3 —

같은 시각, 다른 세계의 새벽 능선 위에 토르가 엎드려 있었다.

찬 공기가 가슴 한복판의 구멍, 관(管)을 통해 등 뒤로 빠져나갔다. 빛이 그 구멍에서 새어 나와 풀잎 위에 작은 별 모양으로 어렸다. 토르는 그 빛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새벽 사냥에서 빛은 거추장 스러운 방해물일 뿐이었다. 

능선 너머 새벽안개 속에서 오린(奧麟) 한 마리가 풀을 뜯고 있었다. 뿔 끝에 인(燐)이 붙어있는 작은 사슴 같은 짐승. 산해경 첫 권에 나오지만 실물은 묘사된 것보다 작았다. 오린의 어깨는 토르의 무릎정도 높이에 불과하다. 오린은 푸르스름한 인이 흘러나오는 뿔로 풀을 톡톡 건드려 영역을 표시한다고 마을 노인이 말한 적 있었다. 토르는 그 말을 반만 믿고 있었는데, 오린이 짚는 풀에는 분명 다른 풀에 없는 푸른 인이 한 점씩 떨어져 있었다.

토르가 활을 들었다. 화살이 시위를 떠나기 전에, 짐승의 영혼에게 짧게 양해를 구했다. 산해경의 짐승을 죽일 때마다 읊어야 한다는 한 마디.

너의 이름을 한 번만 부르고 데려가겠다.

화살이 짐승의 어깨에 박혔다. 짐승이 풀밭 위에 무릎부터 쓰러졌다. 뿔 끝의 인이 죽기 직전 한 번 별처럼 밝아졌다가 천천히 식었다. 토르는 짐승을 어깨에 메었다. 죽은 짐승의 무게는 그것이 살아 있을 때보다 무거웠다. 늘 그랬다. 어떤 짐승의 무게에, 죽음은 마음으로만 느낄 수 있는 한 줌의 무게감을 더했다.

마을 어귀에 비익조(比翼鳥)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두 마리가 한 짝이 되어야 두 날개를 함께 펴고 나는 새. 다른 쪽이 없으면 영영 날 수 없는 속성 때문에, 마을 어른들은 이 새를 싫어하지 않았다. 마을 어귀에 앉은 한 마리의 비익조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닌, 그저 기다림의 표시라고 했다.

미나의 집은 마을 가장 안쪽이었다. 토르가 사냥한 짐승을 마당 평상에 내려놓자, 양어머니 미나가 짐승보다 토르의 얼굴을 먼저 보았다. 나이가 꽤 들었지만 미나의 눈은 항상 너무 맑았다. 사람의 눈은 살면서 한 번씩 흐려져야 하는데, 미나의 눈은 흐려진 적이 없었다. 적어도 토르가 미나를 보아 왔던 기간동안에는...

"무녀님께서 어젯 밤 늦에 너를 부르셨다."

토르의 손이 짐승의 뿔에 닿았다가 그 말을 듣고 머뭇거렸다. 무녀는 마을에 한 명뿐이었고, 그녀가 누군가를 부르는 것은 마을 전체에 큰 일이 있을 때 뿐이었다.

"왜 이제 알려주세요? 큰 일일텐데..."

미나가 보리 한 줌을 까서 그릇에 떨어뜨렸다. 보리 알이 도르륵 굴렀다.

"네가 한 번 더 평범한 아침을 보내기를 바랐다."

미나는 말을 마친 이후 다시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녀는 양 손으로 묵묵히 보리만 까고 있었지만 그 손이  평소보다 떨리는 것을 토르는 느낄 수 있었다. 이윽고 무녀를 만나기 위해서 마당을 떠나는 토르의 등 뒤로 미나의 작은 목소리가 따라왔다.

"네 어머니가 너를 버려두고 가신 게 아니란 것을 잊지 마라, 토르."

토르는 답하지 않았다.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입에 담으면 지금껏 어머니에 대해 가져 왔던 그리움이, 자신을 무너뜨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 4 —

무녀의 거처는 마을 뒤편 절벽 가까이에 세워진 사당 안에 있었다. 사당의 처마 끝에는 작은 새 모양의 풍경(風磬)이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바람이 없어도 가끔 흔들거리며 작게 울렸다. 토르가 사당 앞에 다다르자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풍경이 길게 한 번 울렸다.

사당 안은 어두웠다. 작은 창 아래, 어깨에 새 깃털을 두른 노파가 앉아 있었다. 마을의 모든 노인들 보다 나이가 들었지만, 그녀의 손은 손가락 끝까지 단단했다. 방 가운데에는 물이 담긴 작은 그릇이 놓여 있었고, 그릇 속의 물 위에는 흐릿한 별 그림이 그려진 종이가 둥실 떠 있었다.

토르가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낀 듯 한 무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별이 일곱 개의 눈을 떴다. 보아라."

물 위로 푸른 빛이 솟아올랐다. 마치 간헐천 처럼 솟아오른 물기둥은 바로 무녀의 팔뚝 정도 높이로 머물렀다. 그리고 푸른 물기둥 가운데 검은 점 일곱 개가 천천히 깜박였다.

"별의 눈이 열두 개가 되면 이 행성계는 끝난다. 백 년 전 한 사람이 행성계가 끝나는 것을 거의 막을 뻔 했고 그 자리에는 네 어머니가 함께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행성계의 종말을 완전히 막아내지 못했다. 두 사람중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베었기 때문이다."

토르는 가슴 구멍에서 새는 빛이 잠시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누가 누구를 베었습니까."

"답할 수 없다. 네가 그 답을 들으면 너는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너는 가야만 한다. 다른 세계의 지도사가 너를 부르는 그 곳으로."

무녀가 처음으로 토르의 손 위에 자기 손을 얹었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뼈 위에 쭈글 쭈글한 가죽 한 장만 남은 단단한 손.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남기마. 네 어머니가 너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단 하나의 단어다."

그러자 물그릇 위 푸른 빛 물기등 가운데에서 문자가 떠올랐다. 토르는 그 문자를 소리내어 읽을 수 없었지만, 문자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토르의 가슴에 난 구멍 속으로부터 그 단어의 발음이 저절로 나왔기 때문이다. 다른 세계의 말이지만 토르가 소리내어 부를 수 있도록 가슴의 구멍에서 시작된 음성은 토르의 입을 통해 나왔다. 

"메르."

토르가 그 단어를 처음으로 입에 담은 그 순간, 무녀의 손은 토르의 손등으로부터 천천히 미끄러져 내렸다. 무녀의 몸이 작게 한 번 흔들리고, 그녀의 호흡은 등불을 마지막으로 흔들고 멎었다. 토르가 그 단어를 발음한 그 순간에 무녀는 죽었다. 

토르는 사당을 나와 마을과 반대편 봉우리로 올라갔다. 무녀가 죽은 것에 대해서 슬프지도 울음이 나오지도 않았다. 그에게 지금은 무녀의 생명과 바꾼 한 단어만이 맴돌 뿐이었다. 토르는 작은 바위 위에 앉아, 가슴을 손바닥으로 가렸다가 떼었다. 빛 한 줄기가 새어 나왔다. 늘 동쪽을 향하던 빛이, 지금은 북서쪽을 향하고 있었다. 북서쪽은 마을 너머에 있는 강과 안개 평원, 토르의 마을 사람들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다른 나라들, 그리고 누구로부터도 들은 적 없는 알 수 없는 곳들이 있는 방향이다. 토르의 가슴에서 나온 빛은 그가 평생 봐왔던 어떤 빛보다 가늘었다. 빛이 가늘게 나온다는 것은 토르가 찾는 것, 토르가 가야 할 곳이 멀리 있다는 뜻이었다.

"메르."

토르가 그 단어를 다시 입에 담자, 빛 한 줄기가 가슴 구멍을 빠져나가 북서쪽으로 더 멀리 흘러갔다. 그리고 토르가 있던 봉우리 위의 풀밭에 비익조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마을 어귀에서 보았던 그 새, 어딘가에서 자신의 다른 한 쪽을 잃은 새. 그 한쪽 발에는 깃털 한 점이 매여 있었고, 그 위에 검은 글자 한 자가 적혀 있었다.

起(일어날 기) = 시작해야 하니 일어나라...  토르는 그 글자를 알았다. 여전히 자기가 북서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이성적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가슴 구멍속에서 나온 빛은 이미 그 방향을 향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처음으로 몸이 머리보다 먼저 답을 정한 일이었다.

— 5 —

신림동 원룸. 새벽 네 시.

윤지는 좁은 침대 한 귀퉁이에 쓰러져 코를 골고 있었다. 가스레인지 위에는 식어가는 라면 냄비가 그대로 있었다. 메르는 정신없이 자고 있는 윤지를 물끄러미 보면서 씨익 웃었다. 그리고 메르는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모니터 LED의 빛이 어두운 방을 푸른 우물처럼 비췄다.

화면에는 연구실에서 열어 두었던 동아시아 위성영상이 그대로 떠 있었다. 클라우드 서비스를 통해 실시간으로 동기화 되기 때문에 거기나 여기나 같은 영상이 나오는게 정상이다. 그러나 메르는 무언가 달라져 있음을 느꼈다. 자신이 지도에 그린 적 없는 푸른 선 한 가닥이 명동 좌표에서 시작해, 한반도를 빠져나가, 동해 너머, 태평양 한가운데를 거쳐 그 너머로 길게 그어져 있었다.

'이건 뭐지? 윤지가 건드린 것은 아닐 텐데..'

메르가 천천히 마우스 휠을 굴렸다. 화면이 줌아웃되었다. 태평양이, 대륙들이, 대양들이 차례로 사라지고, 화면이 한 점이 되었다. 이제 우주를 보는 모드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구를 의미하는 그 점 근처에 푸른 별 하나가 보였다. 그리고 그 별 위에는 어떤 지구의에도 없는 거대한 대륙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대륙은 실루엣만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그 위에 누군가 작은 글씨로 무언가를 적어둔 것이 보였다. 한국어도 한문도 영어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메르는 읽을 수 있었다. 어렸을 적 어머니가 책상 옆에 와 뜻 모를 단어 위에 손가락으로 발음을 써 주던 그 때 처럼. 대륙 한가운데에 단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시작.

메르는 외투 안주머니에서 음반가게 할머니가 건네 준 검은 막대를 꺼냈다. 도무지 그 막대의 용도가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이리 저리 움직여 보면서 살펴 보았다. 계속 살펴보다가 막대의 한쪽 끝이 대륙이 띄워져 있는 화면과 가까워졌다. 메르가 계속 막대를 돌려 보면서 막대에서 무엇인가 찾아보려 했고 어쩌다 그 막대 끝이 화면에 닿기 직전, 무언인가가 메르의 손목을 잡았다. 화면 안에서 나온 검은 손이었다.

메르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모니터의 화면이 양 쪽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명동의 레코드 가게가 아니라 메르의 방이 사라졌다. 윤지의 코고는 소리도, 식어가는 라면 냄비도, 책상 모서리에 붙여 둔 어머니 사진도 누군가 빨아당기는 것처럼 뒤로 사라져 갔다.

메르는 검은 손에 끌려 화면 너머로 빨려들어갔다. 빨려들어가는 중에 마지막으로 본 것은, 푸른 항성의 이미지에서 여덟 번째 검은 점이 천천히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다음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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